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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만의 시간
16.
-종인의 이야기 Ⅶ-

 

 

 [뒤에 스토커 있음.]

 

 집에 가는 길에 갑자기 세훈에게 문자를 받았다. 무슨 말인가 싶어서 걷던 걸음을 멈춰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랬더니, 저 뒤에서 나를 쫄래쫄래 쫓아오는 도경수가 보인다. 보통, 내가 뒤 돌아보면 숨는 게 정상 아닌가. 뻔뻔한 건지, 바보 같은 건지. 내가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앞만 보고 걷고 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원래는 바로 집에 가려고 했는데 도서관으로 방향을 틀었다. 참, 웃긴 상황이다. 도경수가, 나를 따라 오다니. 길가에 세워진 자동차 사이드미러로 나를 따라오는 그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뭐가 그리 좋은지 웃고 있다. …바보 같다.


 열람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공기가 탁하다. 환기라도 좀 시키지. 창문을 열어 놓고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서 책을 몇 권 꺼내어 책상 위에 정리 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는데 옆자리로 누군가 다가온다.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하다. 노래를 재생시키려고 핸드폰을 꺼내는데, 옆에서 큼큼 하는 헛기침 소리가 들린다. 끝까지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소리에 그냥 옆을 한번 보았다.

 

 “안녕!”

 

 여기, 도서관인데. 조금, 큰 목소리로 손을 흔들며 인사하더니 의자를 빼고 자리에 털썩 앉는다. 전엔 몰랐는데, 소음이 꽤 많은 아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그 아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샤프를 쥐고 공부를 시작하려다가 연습장을 꺼냈다. 왜 꺼냈지? 하얀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딱 두 글자를 적어 그 아이에게 슬쩍 내밀었다.

 

 ‘뭔데.’

 

 왜 따라왔냐고, 다 알고 있다는 뜻으로 적은 건데 도경수가 알려나 모르겠다. 슬쩍, 옆을 보니 처음엔 내가 내민 연습장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씨익 웃는다. 내 뜻을 모르는 게 분명하다. 보면 볼수록, 도경수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의외로 단순하다 던지, 은근히 적극적이라는 것, 공부에 대한 걱정은 많으면서 지지리도 안한다는 것, 조금 멍청하고 뻔뻔하다는 것 정도? 신경 쓰지 말아야지 했으면서 다 파악하고 있는 난 뭔지…. 조금 멍한 표정으로 귀에서 이어폰을 빼려다가 말았다. 노래는 듣고 있지 않았지만, 이거라도 껴야 도경수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고 있는데, 다시 연습장이 나에게 왔다. 들여다보니, 적혀 있는 글자는 딱 두 글자.

 

 ‘뭐가?’

 

 진짜 뻔뻔한 건지 아니면 뻔뻔한 척 하는 건지. 한참동안 그걸 바라만 봤다.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모르겠어서.

 

 ‘너 언제부터 여기서 공부 했는데.’

 

 찔리라고 작정하고 독하게 썼다. 이건, 못 피해 나갈 거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그 아이에게 건넸다. 근데 도경수가 나 따라왔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그땐 어떻게 반응하려고 그랬던 걸까. 저질러놓고 보니, 대책 없다는 생각에 아차 했다.

 

 ‘그게 왜 궁금한데?’

 

 도경수가 내민 연습장에 적힌 글자를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날카로운 질문에 샤프를 쥔 손이 멈췄다. 우리 둘 다 질문에 대한 답은 알고 있었지만 그냥 이대로 모른 척 덮어두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공부해.’

 

 무표정한 얼굴로 슥, 연습장을 내밀어 그 아이에게 보여주고 다시 가져왔다. 그런 나를 보고 슬쩍 고개 숙여 웃는 그 아이를 보았다. 지금 내 옆의 도경수를 보니 예전의 내가 생각이 난다. 무섭도록 그 때의 나와 같아서 뭐라 반박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걔가 널 좋아하는 것 같다던 준면이 형의 말과, 한 대만 때려도 되냐는 세훈의 말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처음엔 아닐 거라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부정하기만 했는데 이제야 알겠다. 나를 향한 도경수의 마음을.

 그리고, 난 그런 도경수에게 또 다시 흔들리고 있다. 그렇게 상처를 많이 받았으면서 또 다시 좋아지려고 한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아니라고, 부정을 몇 번이나 했지만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이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끔 상황이 흘러가고 있다. 그래도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내 앞에 놓인 미래에 망설여지는 나를 달랬다. 옆에 도경수를 두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느라 공부가 전혀 되지 않았다. 이럴 거라는 걸 알면서도 도서관에 온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옆을 보니, 그 아이는 꽤 열심히 공부를 하는 건지 미동도 없다. 그에 비해 나는 책을 펴 놓긴 했는데 자꾸 잡생각만 든다. 오늘 공부는 끝났다. 그래서 그냥 엎드려버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을까, 가만히 눈을 감은 얼굴 위로 시선이 느껴진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온기가 다가오는 것 같아서 얼른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편한 쪽으로 자세를 잡는다는 게 그만, 도경수 쪽으로 누워있었던 거다. 혹시나, 내가 깨어 있다는 걸 알아챌까봐 끝까지 눈을 감았다. 가까이 다가오던 온기가 멀어졌다.

 

 “야, 너 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그 아이의 목소리에 움찔했지만 더욱더 감은 두 눈에 힘을 줬다.

 

 “자는 거 맞지?”

 

 이번에는 펜으로 옆구리까지 콕콕 찌른다. 아플 정도로 세게 찔렀지만 꾹 참았다. 그러고 있으니, 잠시 후 내 책상 위로 도경수의 팔이 지나간 것 같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내가 여기서 눈을 뜨고, 안자고 있었다는 걸 그 아이가 알게 되면 얼마나 어색해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냥, 자고 있는 걸로 해두는 게 마음 편하다.

 -지이잉

 가까운 곳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곧,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다시 내 책상 위로 온기가 느껴졌다.

 

 

 

 

 마음속으로 100까지 셌다. 그리고, 조심히 고개를 들어 내 책상위의 변화를 살폈다. 책도 그대로고, 필통도 그대론데 도대체 뭘 가져갔던 건지 모르겠다. 잠시 인상을 쓰며 핸드폰을 집었다. 홀드 버튼을 누르자 부재중 전화가 한 건 와있기에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름을 자세히 봤다.

 ‘도경수’

 액정 화면에 뜬, 그 이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옆에 앉은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걸 보고 웃었던 건가…. 지금 이 순간도 기분이 이상했다. 이건 진짜 부정 못하겠다. 도경수가, 날 좋아하나보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1년간 만난 적도 없고, 부딪힌 적도 없는데 왜 이제야 날 좋아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그 아이가 날 좋아한다고 인정하니까 그간 내게 왜 그렇게 했는지 다 알 것 같았다.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 아이의 의도를 알게 되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렇게 날 좋아하게 될 거였으면서 왜 그때 그랬었는지. 조금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옆에 앉은 도경수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씨익 웃는 그 모습에 더 혼란스러워서 못 본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만 자고 공부 좀 해.’

 

 이번엔 도경수의 노트다. 이런 거 유치하지만 노트를 주고받는 것도, 마치 너와 나의 관계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내가 먼저 내밀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니가 먼저 내민다.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다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도경수에게 마음을 많이 열었나보다. 옆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이렇게 노트에 낙서를 써서 주고받는 것. 예전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다고 생각하자 조금 씁쓸해졌다. 

 

 ‘너나 잘해.’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은지 모르겠다.

 

 

 

 

 

 

 

 

 

 

 “상담하고 오는 길이야?”
 “아, 어.”

 

 점심시간, 담임과 상담을 하고 오는 길에 복도에서 세훈이와 마주쳤다. 마주쳤다기보다, 10분 뒤에 상담하러 가야되는 오세훈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뭐래?”
 “좋게 말하려고 애는 쓰는데 결론은 하나지 뭐, 너 따위 성적 가지곤 그 대학 못 간다.”
 “간접적으로 돌려서?”
 “응. 담임이 좋게좋게 말 하더라…. 아, 그래도 절망적이라니까?”

 

 상담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요즘 통 공부를 안 한 덕에 모의고사 점수가 뚝 떨어졌다. 그래서, 뭐 보기 좋게 혼났다. 그래도, 선생님 딴에는 억지로 돌려서 좋게좋게 말하려고 했는데 전달하려는 의사가 ‘공부 더 열심히 해야 된다’였으니. 그래도 이번 기회를 통해 자극을 받은 것 같다. 오늘부턴 공부 열심히 해야지.

 

 “니가 그러니까 나도 상담하기 무섭다. 존나 가기 싫어.”
 “뭐래. 나보다 성적도 좋은 게.”
 “학원 빨이지 학원 빨. 너도 우리 학원 오라니까?”
 “그럴까? 엄마한테 말 해봐야겠다.”

 

 세훈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복도 창가에 서 있었는데, 자꾸만 시선이 느껴졌다. 누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기분 탓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참, 야 이번 주 토요일 우리 집 비어.”
 “엥?”
 “엄마 아빠 시골 내려가신대.”
 “오, 그래? 혜인 누나는?”
 “외박하겠지 뭐.”
 “오랜만에 달릴까?”
 “콜. 변백한테도 얘기해.”
 “콜! 오랜만에 김꽐라, 변꽐라 보겠는데?”
 “헐?”

 

 전에, 한번 백현이네 집에서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그때 오세훈 빼고 우리 둘이서 거나하게 취했던 적이 있었다. 혼자 멀쩡했던 세훈이 뒷정리라도 해놨을 줄 알았는데 뻔뻔하게 그냥 씻고 들어가서 잤단다. 아침에 꼬장꼬장하게 일어나자마자 셋이서 열심히 집 청소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변백현은 계속 토하고. 나는 술이 덜 깨서 바닥 닦다가 미끄러지고. 그 얘기를 꺼내며 즐거워하는 세훈에게 세 번째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조금 전에 느꼈던 그 시선이 끊임없이 느껴졌다.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일부러 외면했다.

 

 “너 그때 변백현 기억 나냐? 존나 웃겼는데. 자꾸 닭 먹으라고 입에 넣어주다가 갑자기 병신같이 닭이 막 불쌍하다고 울고.”

 

 세훈이가 말 하던 그 때가 생각이 나서 픽 웃었다. 일부러 무시하려고 마음먹으니까 어째, 더 신경 쓰인다. 그래서 그냥 쳐다보고 있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 애 쪽을 봤다. 혼자, 고개를 휙휙 돌리고 있던 도경수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더 커지더니 혼자 헉, 숨을 들이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린다. 그러면서 곧, 얼른 손에 쥐고 있던 책으로 얼굴을 가리는데 그게 모양새가 좀…. 책을 들어도, 꼭 거꾸로 드냐. 잠시 동안의 원맨쇼를 감상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그런, 내 얼굴을 본 세훈이 역시 내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헐? 쟤 뭐냐.”


 놀란 그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쟤가 나 좋아하는 것 같아.”

 

 여전히 단어 책을 거꾸로 든 채 얼굴을 숨기고 있는 도경수를 보며 세훈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세훈이 꽤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본다.

 

 “어? 너 어떻게 알았어?”

 

 역시, 세훈이는 알고 있었던 거다.

 

 “…그냥.”
 “난 너 눈치 없어서 모를 줄 알았는데…. 쟤가 너한테 고백이라도 하든?”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이야…, 대단한 발전이다.”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박수까지 친다. 그래서 다시 엿 먹으라고 손가락을 올려줬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뭘?”
 “쟤 마음 알았잖아…. 이번엔 선택권은 너한테 있어.”

 

 뭘,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사실은, 준면이 형이 단도직입 적으로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몰랐을지도 모른다. 알고 나서 보면 이렇게 쉬운 걸.

 거꾸로 쥔 책을 눈까지 슬그머니 내리던 도경수와 또 한 번 눈이 마주쳤다. 내 시선에, 얼른 다시 책을 들어 올려 그나마 보이던 눈을 가려버린다.

 귀엽다.

 

 “…글쎄.”

 

 귀여운데, 그 아이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내가 싫다. 이렇게 쉽게 마음을 열어버리면 예전의 나는 무엇이 되어버리는 걸까…. 그때의 나는 불쌍해서 어떻게 하라고.

 

 

 

 

 


 

 

 

 

 


 또, 당연하다는 듯이 도경수가 우리 집 소파에 앉아 있다. 어이없는 얼굴로 그 아이를 쳐다보고 있는데, 누나가 그런 나에게 ‘경수 내가 불렀어.’ 하고 말한다. 만날 김혜인 때문에 엮이는 것 같단 말이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아무 생각 없이 도경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도경수가 내 눈치를 보며 조금 움찔 한다. 그 얼굴을 보자, 점심시간의 기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었다.

 

 “야, 너 뭘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어?”

 

 그냥 웃은 건데, 기분 나쁘게 웃었다고 하면 내가 좀 억울하다. 나를 발로 차며 묻는 누나의 말에 도경수를 슬쩍 쳐다보니까 울상을 짓고 있다. 기분 나쁜 웃음이라고 받아 들였나보다. 뭐지…. 해명 할까 하다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리모컨을 눌러 채널을 돌렸다.

 

 “알 거 없어.”

 

 그러면서 또, 슬쩍 도경수를 보며 웃었다. 그냥, 자꾸 웃음이 나는 걸 어떡하라고. 비웃은 건 아닌데. 또, 그렇게 느꼈는지 조금 전 보다 더 울상을 짓는다. 귀엽다. 오늘만 두 번째다. 도경수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한 것이. 그래서 쳐다보기가 싫었다. 그 아이를 지나쳐, 누나를 향해 물었다.

 

 “엄마는?”
 “오늘 야근이래.”
 “아 맞다, 김혜인 너 어제 외박했냐?”
 “너라니. 이게 죽을라구.”
 “너 오늘 아빠가 가만 안 둔대.”
 “헐? 엄마한테 말했는데, 나.”
 “엄마한테 얘기했지, 아빠한테 했냐. 암튼, 아빠가 벼르고 있어.”
 “이럴 수가. 망했다.”

 

 그 아이가 우리 집에 있는데 누나와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하다니. 실컷 잘 얘기해놓고 방금 깨달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아이가 내 일상에 많이 들어와 있었나보다.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멍한 듯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가 나와 누나를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는 도경수를 봤다. 바보같이 웃고 있다.

 

 “아, 얘 봐. 지 혼자 막 웃네? 진짜 귀엽다”

 

 귀여운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누나가 새로운 보물이라도 발견 한 것처럼 눈을 빛내며 도경수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예전엔 백현이한테 한참 그러더니 이번 목표는 도경수로 정해졌나보다. 그럼, 백현이한테 한 것처럼 머리도 쓰다듬고, 볼도 꼬집고, 엉덩이도 토닥거리고 그럴려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얼른 누나의 손을 탁 쳐냈다.

 

 “귀엽기는.”

 

 누나가 건드리는 게 싫다. 누나가 도경수를 만지는 게 싫고, 그 아이를 보는 게 싫다. 왜, 어째서? 머리가 복잡해졌다. 겉으론 태연한 척하면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경수를 봤고,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들어 내가 지금 무엇을 누르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마구 눌렀다. 채널이 휙휙 돌아가는데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거부감. 누나가 백현이를 대했던 것처럼 도경수에게 하지 않길 바랐다. 아, 짜증난다. 나는 흔들림을 넘어서 그 아이를 좋아하고 있다. 어느새 또 내가 그 애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방금 깨달았다. 생각보다 먼저 나가는 손을 보았고, 난 또 다시 그 애 때문에 무너졌다고 느꼈다.

 

 “변태 새꺄. 뭐 이딴 걸 보고 있어?”

 

 누나의 말에, 아득해지던 정신을 붙잡았다. 시선을 돌려 티비를 보니 여자 속옷이 보였다. 얼른 전원을 꺼버렸다. 등 뒤의 도경수를 의식해서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꺼진 브라운관으로 비치는 그 얼굴을 보며 또다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또 너를 좋아하게 돼버렸다.

 부정하려던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해버리자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음을 인정해도 개운하지가 않다. 여전히 나는 혼란스럽고, 또 복잡하다. 아직도 내게 남은 숙제가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어렵다.

 

 

 


 

 

 


 나와 도경수는 아무 말도 안하고, 누나 혼자 떠드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피자 한 조각을 꾸역꾸역 먹던 그 아이가 이제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누나가 아쉬운 듯 그 아이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난처한 눈으로 다음에 또 놀러오겠다며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서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냥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만 봤다. 어떤 말도, 행동도 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내 마음을 추스르는 게 어려워서 입 밖으로 무슨 말을 꺼내야 될지, 그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될지 몰랐다. 그나마 누나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둘이 있었다면 숨이 막혀서 죽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아이에 대한 마음을 인정함으로써 문제는 거의 해결 직전까지 다가왔다. 도경수가 날 좋아하고, 나도 도경수를 좋아한다. 그러면 이제 서로 마음을 확인 하는 것만 남은 것 같다. 이대로 끝나는 게 맞는 거겠지. 그런데, 내 기분이 썩 좋지가 않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 순간을 애타게 기다려왔고, 그저 행복해 했을 텐데. 바라던 순간임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왠지 모를 두려움이 나를 잡고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나 혼자 머리를 굴려 생각하다가 피자를 먹고 있는 누나에게 불쑥 물었다.

 

 “누나, 저번에 얘기했던 전 남친 있잖아….”
 “누구? 김민석?”
 “아, 어. 그 사람이랑 어떻게 됐어?”
 “그게 왜 궁금한데?”
 “말 좀 해줘.”

 

 누나가 입으로 가져가던 피자를 다시 내려놓는다. 표정이 썩 좋지 않다. 그래도, 저번처럼 마구잡이로 화를 내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 어두워진 얼굴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누나가 혀로 입술을 축이며 말한다.

 

 “결국 다시 만났어. 얼마 못가서 헤어졌지만….”
 “…왜?”

 

 내가 이런 것 까지 너한테 말해야 돼? 하면서 궁시렁 거리던 누나가 머리를 긁적인다.

 

 “똑같은 이유로, 또 상처받았거든.”

 

 누나의 말과 함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누나가 말을 안 하니까 집 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적막만이 맴돌았다. 조금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내 어깨를 툭 치던 누나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씩 웃는다.

 

 “야, 피자 식는다. 빨리 먹자.”

 

 누나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남겨진 피자 한 조각을 물면서 그 말뜻을 곱씹었다. 그래, 상처. 또다시 상처받을까봐 난 무서웠던 거다. 다시 시작한다면 또 한 번 상처 받을 수도 있을 거라고. 물론, 지금의 그 아이와 예전의 그 아이는 다르지만 두려움이 먼저인 건 어쩔 수가 없다. 예전의 나를 떠올리면,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 겁부터 났다.

 나는, 할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불구덩이에 뛰어들 만큼 그 아이를 좋아하진 않을 거라고. 그럴 자신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일 년 전의 이야기.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피곤해서 눈을 감고 엎드렸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공부가 하기 싫어서 그냥 좀 쉬고 싶었다. 옆에 앉은 김종인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꽤 공부를 열심히 한다. 얜 지치지도 않나. 딴 짓 한번 하는 걸 못 봤다. 쉴 거라면서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네. 아씨, 괜히 머리만 더 복잡하잖아. 다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눈을 뜨려는데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반쯤 떠있던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 위로 그 아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머리를 만지던 손이 얼굴로 내려와 이마를 건드리고, 속눈썹을 간질인다. 좀 간지러워서 인상을 썼더니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에서 손이 멀어졌다.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인상을 풀자 다시 다가온 손이 볼을 스치고 지나가 내 손가락을 잡아 올린다. 조심스럽게 다섯 손가락을 차례로 만지다가 깍지를 껴온다. 꽉 잡는 것도 아닌, 아주 느슨하고 헐렁하게.

 맞잡은 손이 아주 뜨거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아인 내게 진심이라는 걸.

 

 

 

 

너와 나만의 시간
17.

 

 

 

 좋아하니까 다가가려고만 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내가 김종인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마음이 심란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미움 받고 있다는 건 꽤 슬픈 일이다. 게다가, 그게 다 내가 자초해서 그런 거라면 더 슬프다.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좋다고 할 땐 쳐다보지도 않던 애가 이제와 좋다면서 친하게 지내재. 물론 걘 아직 내 마음을 모르는 것 같지만 어찌됐든 내가 다가간 건 사실이니까 내가 김종인라도 어이없고 화날 것 같다.

 그 애를 생각하면 내가 이러면 안 되는 게 맞는데, 내 마음을 이미 인정해버린 뒤라 그게 어렵다. 자꾸만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데 못 가게 막는 것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 어떻게 보면 이것 또한 나를 위한 변명이다. 김종인을 생각해주는 척 하면서도 결국은 내 생각만 한다. 변백현 말대로 나는 참 이기적인 것 같다.

 내 생각, 걔 생각만 번갈아 하다가 개교기념일을 보냈다. 백현이 집에선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두 멍청이와 마음껏 놀았지만 내 머릿속을 뒤 흔드는 생각은 백현이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꼬여왔다. 어제 술에 취해 널브러진 변백현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지만 웬일로 끝까지 멀쩡하게 남아 나와 함께 뒷정리를 하던 박찬열의 시선을 모른 척 무시했다. 그 귀신같은 놈은 이럴 때만 또 쓸데없이 눈치가 빨라서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일지 대충 알고 있을 거다. 아, 복잡하다.

 지금 내 상태를 쉽게 말하자면, 숙제가 있었는데 그걸 까먹고 신나게 놀다 수업시간이 되어서야 숙제를 검사하겠다는 선생님의 말에 아차 하는. 뭐 그런 상태랄까.

 내 앞에 놓인 애정전선은 탄탄대로 일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내 시작점은 0부턴데 그 아이의 시작점은 마이너스다. 왜냐면, 내가 작년에 저지른 짓거리 때문에. 그때의 내가 왜 그랬을까. 나에 대한 그 애의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면서 끝내 문을 열지 않았던 날 원망했다가 곧 그만뒀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만큼이나 그저 감정에 충실했을 뿐일 테니까.

 사람 일은 한치 앞도 모른다는 말이 맞았다. 내가, 김종인을 좋아하게 되다니. 그것도 1년이 지난 후에야.

 김종인은 날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근데 우연히 옆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고, 백현이를 통해 자꾸 마주치고 달라진 내 행동 때문에 그 아이도 지금 엄청 혼란스러울 거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데 내 진심을 모르니까 무작정 밀쳐낼 수도 없는 거지. 자주 얼쩡거려야겠다. 더 성가시게 굴어야지. 그래야 너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자꾸 눈에 밟힐 테니까. 나를 잊게 하면 안 돼. 그렇게라도 자꾸만 그 애의 머릿속에 있고 싶었다.

 

 

 

 

 

 

 

 

 속 시끄러워 죽겠는데 주번인지라 수업시간만 끝나면 칠판을 지워야했다. 아, 선생님들 판서 좀 안했으면 좋겠다. 특히 수학 시간 끝나고 칠판 지우는 게 제일 싫다. 온갖 짜증을 내며 억지로 칠판위에 어지럽게 쓰인 글자를 벅벅 지워나갔다. 지워도, 지워도 그대로인 것 같아 이상해서 옆을 쳐다봤더니 박찬열이 분필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다. 아씨, 저게.

 그렇지 않아도 짜증나 죽겠는데 굳이 또 나한테까지 와서 시비를 건다. 학원 숙제 없냐? 없냐고. 만날 쉬는 시간마다 앉아서 숙제한다고 바쁘더니만 오늘은 그것도 없는지 아침부터 나랑 백현이를 번갈아가며 괴롭힌다. 원래는 나보다 더 반응이 좋은 백현일 주로 괴롭혔는데, 오늘 숙취 때문에 아직도 고생하던 백현이 건드리지 말라고 화를 내는 바람에 평소처럼 장난치진 못하고 괜히 그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안 먹히니까 나한테 와서 툭툭 시비를 건다. 따지고 보면 나도 오늘 기분 굉장히 안 좋은데. 내가 왜 기분이 안 좋은 건지, 뭐 때문에 이러는지 다 알면서 이런다. 박찬열 개새끼.

 얄미워서 칠판지우개를 얼굴에 던질까 하다가 참았다.

 

 

 

 

 

 

 

 

 


 수업시간, 핸드폰을 뒤지다가 우연히 문자 수신함을 봤다. 놀래 자빠질 뻔 했다.

 

 [ㅇㅑㅈ냐ㅈㄴㄱ?]
 [ㅂㄴ듀어가???]

 

 아무리 봐도, 의미를 알 수 없는 이 따위의 문자를 무려 열한 개나 김종인에게 보낸 것이다. 술 마시다 갑자기 샘솟는 용기에 손가락을 막 놀려서 보낸 게 이런 거라니! 이러니 답장이 없지! 이따위 문자에 뭐라고 답장을 해야 해? 오 마이 갓.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며칠 전 보낸 문자만 해도 스팸이 아니었는데, 이건 스팸처리 했다고 해도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짜증나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누가 나한테 이랬음 당장 전화해서 쌍욕을 퍼부어줬을 거다. 근데 내가 마구 술주정을 부렸는데도 김종인은 그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날 잡아주진 않더라도 밀어내진 않는 김종인이 대인배거나, 아님. 나한테 흔들리고 있는 거 거나. 후자였음 좋겠다. 나도 모르게 괜한 기대를 가져본다. 어쩌면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아예 무시해버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 생각 범위 밖의 얘기니까 패스.

 머릿속으로 그 아이를 떠 올렸다 그랬는데 얼굴이 잘 기억이 나질 않아서, 핸드폰 앨범에서 김종인의 중학교 졸업 사진을 꺼내 보았다.

 아, 잘생겼다. 난 이 잘생긴 아이를 좋아한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나와 그 아이를 둘러싼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란 걸 안다. 섣불리 입을 놀려 내 마음을 알게 된 그 애가 날 밀쳐내면 그땐 진짜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마음속으로만 말했다. 나, 너 좋아해 하고.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아, 나 수학 문제 풀려고 연습장을 꺼냈던 건데 정신을 차려보니 거기에 온통 낙서뿐이다. 자세히 보니, 김종인 기다려, 내가 곧 감. 성가심. 귀찮음. 하트. 뭐 이따위의 김종인과 관련된 그런 단편적인 단어를 잔뜩 끄적여 놨다. 중간에 의미 없는 까만 동그라미도 몇 개 보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멍 때리고 있었나보다. 아무튼, 그러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박찬열이 내 연습장을 슥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뒤늦게 깜짝 놀라서 얼른 연습장을 덮어버렸다.

 

 “다 봤어?”

 

 끄덕끄덕,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박찬열의 표정에 울고 싶어졌다. 아씨, 쪽팔리게. 허탈한 표정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아, 진짜 나가 죽어야 돼 도경수.

 

 “뭘 숨기고 그러냐. 이미 다 알고 있는데.”
 “하긴.”

 

 비어있는 앞자리 의자에 거꾸로 앉아 덮어두었던 내 연습장을 꺼내며 찬열이가 펜으로 엑스자를 친다. 뭐지? 뭐하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그냥 가만히 보기만 했다.

 

 “생각 좀 그만해라.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냐?”
 “야, 난 진짜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김ㅈ….”
 


 또, 그 아이의 이름을 얘기하려기에 식겁하며 입을 막아버렸다. 아, 이 새끼 이건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누가 들었을까봐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확인하는데 다들 제 할 일만 하고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 모습을 보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이건 뭐, 혼자 찔려서 움찔 하는 꼴이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아, 뭐 걔 이름 부르면 큰일이라도 나냐?”
 “몰라, 그래도 좀…그래.”
 “유난은.”

 

 찬열의 입을 막은 손을 떼면서 교복 바지에 슥 닦았다. 으, 땀. 더러워.

 

 “후회와 반성의 시간은 충분히 가졌고?”
 “어,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거 아냐.”
 “근데 너 진짜 병신 같은 건 알아?”
 “알아, 안다고!”

 

 안 도와줄 거면 가만히라도 있던가. 괜히 와서 사람 마음 복잡하게 들쑤시기나 한다. 아까는, 칠판 지우는 데 쫓아와서 시비를 걸더니 아주 시비 거는 방법도 가지가지다. 짜증나서 박찬열을 부라렸다. 내 눈은 크니까 무서울 거야. 그랬더니, 만만치 않게 눈 큰 박찬열이 똑같이 부라린다. 외계인 같이 생겼다. 거울이라도 보는 것 같아서 얼른 표정을 풀었다. 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 유치하다. 초딩도 이렇게는 안 놀 거야.

 

 “사과라도 해야 되나?”
 “너 걔 존나 좋아하나보다.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까지 하고?”

 

 찬열의 말에 새삼 부끄러워졌다. 내가 그렇게 많이 김종인을 좋아했었던가.

 

 “닥쳐.”

 

 얼른, 닥치라고 말했더니 박찬열이 음흉한 표정으로 이상하게 웃는다. 재수 없어.

 

 “…그냥 좀 가만히 내버려둘까?”
 “글쎄.”
 “아, 어렵다 진짜….”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다. 이거는, 진짜 너무 어려운 것 같다. 어려워, 어려워. 너무 어렵단 말이지. 연애가 원래 이렇게 어려웠던 건가? 어? 그런 거야? 아니지, 연애가 아니지. 이건 일단 내 짝사랑이지. 짝사랑은 원래 이렇게 힘든 겁니까? 예? 그런 거예요?

 머리가 복잡해서 괜히 얼굴을 맨 손으로 마구 문질렀다. 볼을 꼬집어도 봤다가, 귀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손으로 얼굴을 때려보기도 하고. 이런다고 답이 나와? 어? 아씨, 얼굴만 아프다. 혼자 그러고 있다가 문득, 바로 앞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을 박찬열을 한번 바라보니까 또 한심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다. 얜 진짜 마음에 안든다. 도움이 안돼요, 도움이.

 

 “뭘 봐.”
 “인과응보지, 암.”
 “닥치라고 좀. 어? 니가 안 그래도 나 머리 터질 것 같거든?”
 “이야, 진짜 걜 좋아하는 구나, 니가... 오늘 여러 번 놀라네.”
 “보면 몰라?”

 

 내가, 얼마나 김종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면 모르냐고. 내 생각만 했으면 지금도 벌써 그 애 옆에서 얼쩡거렸어야 했다고, 근데 차마 그러질 못하겠어서 잠시 쉬고 있는 건데. 그러면서도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거고. 문득, 일단은 가만히 지켜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괜히 자꾸 눈에 띄면 반감만 일으킬 것 같아서. 당분간은 이렇게 멀리서 숨죽이고 있다가 틈새를 노리는 거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그러면 그땐 날 받아주려나…. 아, 그 애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안 되니까 더 어렵다. 이건 너무 가혹한 숙제인 것 같다. 뭔 생각을 이렇게 많이 하는 건지. 진짜, 박찬열 말대로 인과응보인건가. 한숨이 나온다.

 

 “야, 그래도 사과는 해야겠지?”
 “아니. 그냥 가만히 내버려둬. 그 애한테도 생각할 시간을 좀 주는 게 맞는 것 같아.”
 “생각? 무슨 생각?”

 

 가만히 내버려두라는 박찬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내 생각이랑 같아서 수긍하고 있는데, 뒤따라 나오는 말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었다. 생각은, 무슨 생각이냐고. 물론 혼란스러울 건 알고 있지만 그 아이도 지금까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많았을 텐데, 나 때문에.

 

 “티를 좀 냈어야지….”

 

 찬열이가 나를 향해 혀를 찬다. 무슨 말이지? 모르겠다.

 

 “됐고, 아무튼 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줘. 딱 지금이 그럴 때야.”
 “응. 나도 앞으로 걔랑 어떻게 할지 생각 좀 해봐야겠다.”
 “아이고, 병신. 넌 선택권이 없네요.”
 “제발, 좀. 어? 찬물 좀 끼얹지 말지?”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아닌 척 하며 꺼지라고 얼굴을 밀어버렸지만, 찬열의 말에 울고 싶어졌다. 나도, 이럴 줄 알았겠냐고. 아, 속상하다 속상해. 불꽃이 다 타버리고 남은 재를 붙잡고 있는 것 같은 심정이다. 그때의 내가 너무 밉다. 철없던 시절의 내가. 나중에, 언젠가 그 아이를 붙잡고 꼭 사과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꿈을 꿨다. 예전처럼,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그런 꿈 말고. 그냥, 김종인이 나오는 꿈. 내용이 기억이 나진 않는데 그 아이가 나왔다는 건 확실하게 기억이 난다. 아침에 눈을 번쩍 뜨자마자 그것만 기억난다. 꿈속에서 보았던 김종인의 얼굴. 아, 이건 또 뭐야. 이젠 하다못해 꿈에 까지 나온다. 아, 진짜 중증이다.

 오늘도 집을 나서면서 옆집을 힐끔 봤다. 그런데, 타이밍 좋게 김종인이 문을 열고 나오는 게 아닌가. 순간, 입 꼬리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올라갔지만 내가 웃고 있는 걸 보면 기분 나빠 할까봐 억지로 웃음을 감췄다. 부자연스러웠지만 그래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서 그 아이에게 인사하려고 한발자국 다가갔는데, 날 본건지 만 건지 목을 가다듬는 순간 쌩하니 지나가버린다. 조금, 당황해서 얼른 쫓아가려다가 말았다. 오버는 하지말자, 경수야. 하고 나를 달래면서 일부러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걸었다. 어차피, 목적지는 같으니까.

 기분이 좀 이상했다. 그 아이의 가방을 바라보는데 뭔가 울컥했다. 그 마음을 모르고 너를 혼자 바라봤을 때와 지금은 너무 다르다. 얼굴 한번 보는 게 뭐라고 계속 힐끔거리고, 너 하나 때문에 마음 졸이고, 니가 웃으면 나도 웃고, 니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하루 종일 걱정을 하고. 난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힘든데. 이런 걸 너는 얼마나 오래 했던 걸까.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가 예전엔 니가 서있던 자리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되게 이상했다. 보이는 건 김종인의 단정한 뒷모습 뿐 인데. 넓은 어깨에 메어진 가방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땅으로 고개를 숙였다.

 호기심에 널 만났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너를 위해 딱 잘라서 거절했어야 했는데. 경솔했던 어린 내 행동에 니가 상처를 받았을 걸 생각하니까 마음이 너무 아프다. 너한테 상처를 준 게 다름 아닌 나라서, 그게 더 나를 아프게 한다.

 내가 따라오고 있는지도 모를, 그 아이의 뒷모습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 할 수만 있으면 시간이라도 돌리고 싶어.”

 

 김종인은 항상 이어폰을 끼고 다니니까 내 말을 못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언젠가는 니 얼굴을 마주보고 두 손을 꼭 잡으면서 말해줄 것이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너와 나만의 시간
18.

 

 

 

 아침에, 그 아이를 한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면서 많은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걔한테 그렇게 상처를 줘놓고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았던 나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만약에, 김종인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까지도 몰랐을 거다. 나 때문에 그 애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죄책감이 밀려왔다. 난 내가 착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제와 알고 보니 난 나쁜 새끼였다. 그것도 사람 마음가지고 장난친 제일 나쁜 새끼.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배운 것도 많고, 느낀 것도 많고. 내면적으로 성장했다는 말이겠지만, 물론 그만큼의 아픔도 있었다. 예전 기억을 떠올려 그 아이를 생각하면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 먼저 다가와주고, 말을 걸어주고, 챙겨주고. 뭐랄까, 예전엔 조금 물렀다면 지금은 더 단단해진 느낌이 든다.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객관적으로 봐서. 그게 다 나 때문에 겪은 시련 때문이겠지? 결국 모든 생각은 나로 인한 상처로 귀결된다. 그러면 나는 또 절망하면서 머리를 부여잡고. 진짜, 아침에 내가 말했던 것처럼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이라도 되돌리고 싶다. 그러고 예전의 나를 찾아가 뺨이라도 찰싹찰싹 때려야 된다. 그게 아니면, 니가 나중에 좋아하게 될 애니까 상처주지 말라고 말이라도 해주고 싶다. 근데 그러질 못하니까 또 답답하고.

 

 “난 병신이야….”

 

 책상에 애꿎은 머리만 박았다. 쿵쿵, 점점 세게 박다가 아파서 관뒀다.

 

 “얘 오늘 왜이래?”
 “글쎄다.”
 “야, 경수야. 너 무슨 일 있어? 엄마한테 혼났나? 아니면 밥 안 먹고 와서 그래?”

 

 백현이 힘없는 내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말을 걸었다. 신경써주는 건 고마운데 좀 어지럽다 야.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더니, 어디 아프냐고 이마까지 짚어본다. 그에 비해, 박찬열은 자기 자리에서 학원 숙제를 펴놓고 날 보는 둥 마는 둥. 그래, 저 놈처럼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변백현 때문에 어지럽다.

 

 “이게 열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기 이마에 한 손, 내 이마에 한 손씩 올리고 짚어보고 있다. 열이 있을 리가 있나. 난 멀쩡한데. 내 이마에 올려 진 백현의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나 완전 멀쩡하거든?”
 “그래? 근데 왜 그렇게 힘이 없어.”
 “내가 어떻게 알아...”
 “니가 모르면 누가 알아?”
 “그러게 말이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다만 조금 귀찮다. 그냥 날 좀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좋겠는데. 아닌가. 백현이가 옆에서 조잘거리면서 말 거는 바람에 김종인 생각을 잠시 멈출 수 있었던 것도 같다. 그래, 생각 해봤자 후회만 되고, 머리만 아프지. 그냥, 잠시 잊자는 마음으로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그랬더니, 변백현이 내 자리에서 멀어지면서 ‘비듬..’ 이러길래 엿을 날려주었다.

 

 “어허, 그 손가락 접지 못할까. 야 도경수, 무슨 고민 있지. 너?”
 “고민은 무슨.”
 “뭔데, 나한테 다 털어놔봐! 혹시 아냐?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지.”

 

 해결, 해결이라. 백현이가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찬열도 감당 안 되는데, 내가 변백현한테 까지 사실을 다 말해야 되려나. 아니다. 얘는 그래도 김종인이랑 친하니까, 무슨 해결 방법을 내 줄 수도 있다. 근데 그건, 백현이가 박찬열처럼 무덤덤하게 받아들였을 경우의 얘기고. 게다가, 얘기를 다 듣고 나면 내 편을 들지, 김종인 편을 들지 모른다. 객관적인 입장에서라면 나라도 김종인 편을 들겠다. 그럼, 나를 내치려고 하겠지? 방해하고, 박찬열처럼 인과응보니 뭐니 하면서 내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을 또 하겠지? 아, 슬퍼. 그냥, 모르는 게 나을 것 같다. 일일이 다 설명하기도 귀찮을뿐더러, 지금은 그럴 힘도 없다. 그래도 신경써주는 게 고맙다. 난 참 좋은 친구를 뒀어. 백현이는 조금 모자라지만 참 착한 것 같은데, 박찬열은 좀 그래.

 

 “전에 우리 집에서 말했던 그 얘기 때문인가?”

 

 생각한다고 백현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그 사이 저 혼자 머리를 굴리던 변백현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면서 나를 본다. 무슨 얘기? 전에 너희 집에서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데?! 조금 놀란 눈으로 백현을 쳐다봤다. 술 취해서 모를 줄 알았더니, 다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표정 보니까 맞는 것 같은데?”
 “아, 아니.. 내가 무슨 얘기를 했는데?”
 “그때 말했던 그 헤어지고 나서 좋아하고 뭐 그거 있잖아! 그거 니 얘기지? 니 얘기 맞지? 뭐야, 누군데. 누군데?”

 

 점점 변하는 내 표정을 보며 확신을 가진 백현이 다시 내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면서 물어온다. 헐, 뭐야. 얘 기억 못할 줄 알았는데 다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이럴 수가. 재빨리 아니라고, 친구 얘기라고 둘러 댔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당황해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기만 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얜 눈치 없으니까 둘러대면 믿으려나. 그러기엔 너무 확신에 차있는데?

 

 “박찬열이랑 나랑 엮어서 설명하더니. 그거 너 맞지? 니 얘기지?”
 “아…,아, 아닌데?”
 “아니긴! 내가 깜빡 잊고 있었는데, 그 얘기 니 얘기 맞는 것 같구만, 뭘.”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되는 거지. 얘한텐 말 못하겠는데. 이건 단순한 연애사가 아니란 말이다! 아, 멘탈 붕괴 직전이다. 난 항상 방심하고 있을 때 한방씩 먹는 것 같단 말이야? 그게 김종인이든, 누구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는 건가. 해명도 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백현에게 마구 흔들리고 있는데 우리 둘을 쳐다보지도 않던 찬열이가 나섰다.

 

 “시끄러, 좀. 어?”
 “뭔데 넌 알고 있었던 거야?”
 “알긴 뭘 알아.”

 

 찬열이 샤프를 내려놓고 그 낮은 목소리로 시끄럽다고 말하자, 백현이 잡고 있던 내 어깨를 놔주곤 찬열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아, 다행이다. 빠져나왔어. 아까, 좀 그렇다고 한 거 취소. 박찬열 최고. 니가 최고야. 역시 넌 내 친구.

 

 “어떤 여자야, 예뻐? 이름은 뭔데. 우리학교 다녀? 동갑, 연상, 연하? 뭔데, 뭔데. 나도 좀 알자. 어? 완전 재밌겠다. 이야, 대박. 도경수 대박.”

 

 이거 봐,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말을 해. 물론, 일반적인 상식에서 어떤 여자냐고 묻는 게 당연한 거겠지만. 잔뜩 들떠서 찬열이와 나를 번갈아보는 백현이의 눈을 일부러 못 본 척 했다.

 

 “박찬열이 너야, 내가 너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진짜, 그런 거 아냐. 그거 다 친구 얘기야.”
 “에, 웃기시네. 원래 고민할 때 친구라고 하면서 자기얘기 하는 거 다 알거든?”

 

 멍청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왠지 모르게 배신감 느껴지는데? 뭐 더 이상 어떻게 빠져나가야 될지 모르겠다. 이미 빈틈을 너무 많이 보여 버려서, 아니라고 부정하는 내 말을 믿어줄 것 같지도 않고. 아, 복잡해. 이건 또 무슨 낭패인지! 때가 되면 언젠간 말하려고 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닌데. 난 도저히 모르겠어서 박찬열에게 좀 도와달라고,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더니, 큰 눈을 끔뻑이며 어깨를 으쓱한다. 나보고 어쩌라고, 뭐 이런 뜻인 것 같다. 망할.

 

 “어어, 방금? 너네 둘이 눈빛 교환했어. 나 다 봤어. 내가 봤어. 방금.”

 

 평소엔 그렇-게 눈치 없고 둔하더니 오늘은 왜이런지 모르겠다. 예리한 눈으로 나랑 찬열이를 번갈아 가리키더니 ‘이번엔 그냥 안 넘어가, 얘기 듣기 전까진 나 못 움직여.’ 하면서 덧붙이기 까지 한다. 이렇게 난처할 수가 없다. 가뜩이나 더운데 땀까지 날 것 같다. 손에 땀났어. 방금. 아니 근데, 이게 전부 나의 얘기라면 탁 털어놓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니까. 이건 내 얘기가 아니라 김종인 얘기도 되니까 말을 못 꺼내겠다. 내가 여기서 백현이한테 모두 털어놓으면 그냥 끝나는 건데, 그럼 김종인은 뭐가 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네끼리 비밀이라 이거야? 완전 섭섭한데 진짜?”

 

 생각하느라 못 들었는데, 그 와중에 백현이가 또 얘기 하라고 여러 번 말했었나보다. 찬열이는 자기 얘기가 아니니까 쉽게 얘기를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처한 표정의 나를 그냥 쳐다보기만 하고 있다. 그 시선에, 백현이가 고개를 돌려 진심으로 섭섭한 얼굴로 날 쳐다본다.

 

 “왜, 왜?”
 “숨기기 있냐. 너네.”
 “아, 그냥 별 일 아니니까….”
 “별 일 아니니까 더 말해줘야지!”

 

 궁지에 몰렸다. 아깐 손에 땀났는데, 지금은 교복 등 쪽이 축축하게 젖은 것 같다.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나를 쳐다보고, 또 말없는 찬열이를 보던 백현이 입을 꾹 다물고 제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기에 얼른 붙잡았다.

 

 “아, 알았어. 말 할게, 말 하면 되잖아.”

 

 

 

 

 

 

 

 

 

 

 

 

 

 “대박.”

 

 당연히 모든 걸 말하진 않았다. 그냥, 내가 처한 상황만 대충 말해주고 상대가 누군 진 절대 말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남자고, 또 김종인 인건 모른다. 아무튼 대충 그렇게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백현이와 함께 내 말을 듣던 찬열이도 그냥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무래도, 이거 뭔가 말린 듯한 기분이다.

 

 “이야, 그래서 니가 오늘 힘이 없었던 거네!”
 “그래그래,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두면 돼.”
 “어떻게 내버려둬. 야, 힘내라 경수야. 걔도 아직 너 좋아할 거야. 에, 표정이 왜 그래?”

 

 그 애가 아직 날 좋아할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상을 지었나보다. 백현이가 내 얼굴을 붙잡고 쩔쩔맨다.

 

 “사랑에 빠진 도경수라니…. 존나 낯설어.”
 “됐고, 배고픈데 매점이나 가자.”
 “지금 5분 남았는데?”
 “다음 시간 뭐지, 윤리? 윤리 맞나?”
 “어어.”
 “괜찮아, 윤리쌤 너 좋아하니까 좀 늦어도 됨.”

 

 박찬열이 또 배고프다고 매점 가잔다. 윤리쌤은 노처년데 백현이를 좀 예뻐한다. 좀 늦어도 백현이가 한번만 봐달라고 애교부리면 그냥 넘어갈 거다. 분명히. 찬열의 그럴듯한 말에 설득당한 변백현이 내 어깨를 툭 치며 같이 매점이나 가자고 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어, 나 같은 게 뭘 먹겠다고. 그냥 굶어 죽어야지.

 

 “왜, 또! 같이 가자. 어?”
 “귀찮아….”
 “아, 진짜 궁상떠네.”

 

 싫다고, 됐다고, 안 간다는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더니 둘이서 양쪽 팔을 잡고 끌고 결국 매점까지 와버렸다. 진짜, 무서운 애들이다. 헐. 끌려오다 시피, 아니지. 난 두 멍청이에게 끌려왔다. 쉬는 시간 5분 남았는데 아직도 북적이는 매점 앞에서 찬열이랑 같이 서 있었다. 백현이는 또 낯선 애들 사이에서 오랜만이라며 인사하고 있다. 진짜, 미친 인맥. 그러고 있으면 박찬열에게 간간히 인사하러 오는 애들도 많이 있다. 얘도 진짜 미친 인맥. 나만 쩌리야. 흑.

 

 “야, 저기 김종ㅇ….”

 

 또! 박찬열이 김종인 이름을 함부로 말하려고 하길래 얼른 입을 막아버렸다. 왜 갑자기 걔 얘기를 꺼내고 그러는 거야. 별말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애 이름 하나로 놀라서 심장이 막 벌렁거린다. 찬열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치운다. 때마침 인사를 마치고 이쪽으로 백현이가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 근데, 양손이 무겁다. 쟨, 인사하러 가놓고 언제 또 저만큼이나 산거지.

 

 “우리 도경수는 힘내라는 의미로 형아가 쏜다.”

 

 그러면서, 나한테 빵이랑 우유를 건네며, 힘내라고 한 번 더 말한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박찬열 넌 1400원 내놔.”
 “야, 그런 게 어딨냐. 내가 전에 사줬잖아. 1400원 가지고 이러기 있냐?”
 “원래 친한 사이일수록 돈 계산은 철저히 하는 거랬어.”
 “니가 언제부터 그랬다고?”
 “지금부터.”

 

 찬열이에게도 똑같이 빵이랑 우유를 나눠주며 돈을 요구하자 박찬열은 억울한 표정을 짓고, 변백현은 뻔뻔한 표정이다. 얘네 또 싸워. 이러니 내가 두 멍청이라고 부르지. 가만히 쳐다보다가 둘 모르게 조용히 혀를 찼다.

 

 “쉬는 시간 1분 남았다.”

 

 두 멍청이가 투닥거리는데, 어떤 하얗고 키 큰 애가 다가와서 백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어, 나 쟤 봤는데. 누구지. 누구였더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다가 아, 기억났다! 저번에 복도에서 김종인이랑 얘기하던 걔다. 김종인 친구.

 

 “아, 깜짝이야!”
 “놀래긴.”

 

 그, 이름 모를 김종인 친구와도 친한 모양인지 백현이 스스럼없이 웃으며 장난을 친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그 하얀 애가 매점 쪽으로 손을 들어 빨리 오라고 손짓하기에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봤더니 느릿하게 걸어오는 김종인이 있다.

 김종인이네. 그래, 김종인.

 

 “안녕?”

 

 백현이와 그 친구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오다가 눈이 마주쳤다. 근데, 그 표정이 좀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어서 멈칫 했지만, 아침처럼 인사도 못하고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 건 싫어서 얼른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

 

 시선이 나에게 한번 닿았다. 그 아이가 눈을 깜빡이는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왠지 모르게 입안이 바싹 탄다. 목이 마르다. 인사를 해놓고, 괜히 손에 땀이 나서 바지에 축축한 손을 문질러 닦았다.


 “어, 안녕?”

 

 그 아이의 시선이 내게서 멀어졌다. 내 인사에 답해 줄 줄 알았는데 나를 지나쳐 내 옆에 서 있는 찬열에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찬열이는 내 눈치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인사를 받아준다.

 뭐지, 방금. 그 시선은 지금까지의 시선과는 달랐다. 날 받아주진 않아도 밀쳐내진 않았던 김종인인데 지금은 밀쳐냈어. 나를, 못 본척했다고.

 아침에 그냥 쌩하니 지나쳤던 것도 일부러 그런 거였나. 아닐 수도 있지만, 방금 그 반응으로 봐선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렇게 또 그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나를 못 본 척 한 그 아이의 반응에 조금 서러워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왜 나를 무시하는 거냐고 불만을 가졌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충분히 이해한다고, 그 아이는 그럴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서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백현이는 하얀 그 친구와 얘기를 나누고, 찬열이는 김종인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나 혼자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 이곳엔 나 혼자 있는 것 같았다.

 

 

 

 

 

 

 

 

 

 

 

너와 나만의 시간
19.

 

 

 


 “아 아직도 머리 아파. 내가 진짜 수학 저주하고 만다. 어?”
 “그러게 공부 좀 하지. 찌질이 새끼.”
 “야, 오늘이 24일이니까 당연히 24번 시킬 줄 알았지! 2 더하기 4 해가지고 6번 시킬 줄 누가 알았겠어? 하필 그 6번이 나일 건 또 뭐야. 아 진짜, 짜증!!”

 

 4교시 수학시간에 백현이가 머리를 몇 대 맞았다. 졸고 있다가, 6번 나와서 3번 문제 풀어보라는 말에 짝이 깨워서 억지로 나가서 분필을 쥐었는데 그걸 풀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칠판 앞에서 멍청하게 눈만 깜빡이다가 맞았지 뭐. 그래서 점심을 먹으면서까지 수학선생님을 가루가 되도록 욕하고 있는 거고. 찬열이는 그런 백현이를 한심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붕어처럼 눈만 꿈뻑이며 밥을 먹고 있다. 아까 빵이랑 우유를 먹어서 배가 안고플뿐더러, 그냥 쉬는 시간 매점에서 봤던 그 아이, 김종인의 눈빛만 자꾸 생각이 나서 밥을 먹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또, 생존 본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먹고 있다. 밥 굶어서 나중에 배고파봐야 나만 손해니까. 에휴, 난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을 거다.

 

 “야, 박찬열 너 수학 문제 다 풀어놨지? 나중에 밥 먹고 니 책 좀 보여줘.”
 “왜?”
 “왜긴, 그거 다 베껴놔야지. 다음시간에 또 시킨다고 그랬는데 그때 안 맞으려면 미리미리 복습 해놔야 될 거 아냐.”
 “그게 복습이냐? 어?”
 “어쨌든. 빌려줘. 아까 1400원 안 받을게.”

 

 옆에서 둘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멍청한 표정으로 밥만 먹었다. 눈이 풀린다. 잠이 오는 건지, 힘이 없는 건지. 오늘 하루도 허망하게 보낸 거나 다름이 없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나를 보던 그 무미건조한 눈빛이 떠올라서 가슴이 콱 막힌 것 같다. 근데 또 밥은 들어가. 참 웃기지. 날 그렇게 보는 그 애를 이해하겠어서 원망을 할 수도 없다. 다 내 탓이고, 내가 죄인이니까.

 기분 전환 겸 매점에 간 거였는데, 가서 기분만 더 나빠져 왔다. 그래도 두 멍청이에겐 티내고 싶지 않아서 애써 밝은 척을 했더니 골이 다 아프다. 지금은 날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으니까 그냥 이러고 있는 거고. 둘이서 계속 티격태격 했으면 좋겠다. 나한테 말을 걸면, 나는 또 아무렇지 않은 척 장난을 치고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일부러 모른 척 해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좀 전에, 박찬열이 그 상황을 두 눈으로 다 지켜봤을 테니. 아, 몰라몰라. 어지러워. 복잡해. 그렇게 또 숟가락 가득 밥을 퍼서 입 안에 꾸역꾸역 넣고 있는데, 건너 편 자리에 아까 봤던 그 하얀 애가 앉아 있다. 하얀 애 앞에는, 조금 까만 김종인이 앉아 있고.

 유난히 까만 머리. 그 익숙한 뒷모습을 본 순간, 밥을 뿜을 뻔 했다. 밥알이 목 뒤로 잘못 넘어가서 쿨럭쿨럭 기침이 난다. 옆에 있던 찬열이 날 보지도 않고 등을 두드려주고, 맞은편의 백현이는 조용히 물 컵을 내민다.

 

 “도경수, 가지가지 한다. 그치?”
 “그러게. 난 연애 안해야겠다. 지켜보기 좀 안쓰럽네.”
 “저게 연애냐? 짝사랑이지.”

 

 기침을 몇 번이나 하고, 물을 들이 마시고 나서야 진정이 됐다. 이러고 나니까 더 힘이 빠진다. 날 두고 헛소리를 하는 두 멍청이를 번갈아 보다가, 그냥 무시했다.


 “아, 그나저나. 어떤 여인이기에 도경수를 바보로 만들어놨냐. 원래 바보였긴 하지만.”
 “여인?”

 

 여인, 은 아니고 저기 하얀 애 맞은편에 앉은 까만 앤데. 백현이는 찬열이가 알아서 상대해주겠지 싶어서 시선을 그쪽으로 돌렸다. 안 보고 싶어도 앞만 보면 볼 수밖에 없는 자리라서 어쩔 수가 없네. 아깐, 날 조금 섭섭하게 만들었어도 어쩔 수 없이 좋은 김종인이니까. 보면 좋단 말이지. 근데 한 가지 아쉬운 건 그 애의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맞은편에 앉은 하얀 애는 안 봐도 되는데 걔 얼굴만 자꾸 보인다. 부럽네, 김종인 친구. 마주보고 앉아서 밥도 같이 먹고, 웃으면서 얘기도 하고. 변백현도 부럽네.

 

 “여인? 왜, 여인 아냐? 애긴가 그럼?”
 “동갑이야.”
 “진짜? 그러면 그냥 여자네.”
 “무슨 기준이냐, 그건.”
 “연상은 여인이고, 연하는 애기고, 동갑은 여자. 오케이?”
 “진짜 병신 같다...”
 “헐? 내 기준이니까 태클 사절이야.”

 

 한번쯤은 뒤돌아봐 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김종인 뒤통수만 노려봤다. 내 눈에서 레이저 나왔으면 쟤 뒤통수 다 뚫렸을 걸?

 

 “그나저나, 동갑이라니. 넌 그 여자 얼굴 봤어?”
 “여자…. 여자라.”
 “왜?”
 “아무것도 아냐.”

 

 김종인이 돌아봐야 되는데, 엇? 그 하얀 애랑 눈이 마주쳤다. 마주친 거 맞나? 맞는 것 같은데. 조금, 놀라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야, 너 밥 먹다 말고 뭐하냐.”
 “그냥 냅둬.”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그 쪽을 쳐다보는데 여전히 그 하얀 애가 날 쳐다보고 있다. 아, 마주친 거 맞구나.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지? 그냥 자연스럽게 피해야 되나. 아니면 인사를 해? 또, 눈을 굴려서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조금, 이상하다. 하얀 애가 나를 보는 시선이 익숙하다. 마치, 김종인네 집에 갔을 때 날 보던 그 애 같다고 해야 되려나. 한마디로 줄이자면 날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이다. 쟤가 왜?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내가 잘 못 느낀 건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내가 그쪽 오래 쳐다보는 거 알면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서.

 

 “아무튼 넌 그 여자 봤어?”
 “응.”
 “헐, 대박. 예뻐? 예뻐?”


 김종인 뒷모습에서 시선을 돌려, 다시 두 멍청이를 바라보니 이러고 앉아있다.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유추해봤을 때 변백현이 또 내가 좋아하는 애의 정보를 캐고 있었던 것 같다. 거기에 박찬열은 몇 개 대답해 줬을 거고. 어이가 없어서 숟가락으로 백현이의 머리를 때렸다.

 

 “야, 알려고 하지 마. 다쳐.”
 “아씨, 더럽게!”
 “니가 더럽냐? 나 이제 밥 다 먹었다. 숟가락 못써.”
 “유치하게 논다, 둘 다.”

 

 다 같이 놀아놓고 마지막엔 저 혼자 고상한 척 빠지려는 찬열이를 향해 엿을 날렸다.

 

 “나도 좀 알자! 걔 동갑이라며? 어떻게 생겼는데, 예뻐?”
 “예쁘면 니가 어쩔 건데.”
 “내가 뭘 어쩐다는게 아니라, 그냥 궁금하잖아?”
 “말 안 할 거거든?”
 “예뻐? 예뻐?”
 “아, 어디다가 얼굴을 들이대. 징그럽게.”

 

 다가오는 백현의 얼굴을 손으로 밀쳤다. 그러면서 또 은근슬쩍 그 쪽을 봤는데, 또! 그 하얀 애랑 눈이 마주쳤다. 이상해. 날 노려보는 것 같다. 아까보다 더 표정이 안 좋은데.

 아, 쟤 좀 이상한 것 같다.

 

 

 

 


 

 

 

 


 노이로제 걸릴 것 같다. 점심시간 이후로 자꾸 졸졸 쫓아다니며 예쁘냐고 묻는다. 옆에서 듣던 찬열이가 짜증이 났는지, 대충 예쁘다고 하고 치우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아, 나도 그러고 싶지. 근데, 백현이가 모른다고 해서 그 애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말하긴 싫은데 어떡하라고.

 

 [예쁘냐?]

 

 하다못해 이젠, 수업시간에 문자까지. 아,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어, 존나 매력적이야. 보면 미칠 것 같이 완벽하게 생겼어.]

 

 분노의 문자를 날렸다. 키패드를 부술 듯이 눌렀다. 터치가 잘 안 된다. 아, 빡쳐. 그래도, 예쁘다곤 안했다, 뭐.

 

 [헐. 대박... 여신이겠네, 그럼.]

 

 여기서 또 아니라고 부정했다간 내일까지 시달릴 것 같아서 대충 답장을 보냈다. ‘ㅇㅇ’ 이렇게. 그럼 안 귀찮게 하겠지 싶어서 핸드폰을 주머니 속으로 넣고 수업에 집중 하려는데 또, 진동이 울린다. 소리가 조금 커서 선생님이 눈치 챌까봐 마음 졸이며 주머니에 넣었던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그만하자, 백현아. 어? 제발, 부탁이니까 그만 좀 하자.

 

 [걔가 아깝겠다.]

 

 그걸 보다가, 짜증이 나서 핸드폰을 꺼버렸다.

 그래, 맞아. 나한텐 김종인이 아까워. 아냐, 아까운 게 어디 있어? 누구하나 넘치고 모자람도 없이 딱 잘 어울리는데. 아씨, 짜증나.

 

 

 

 

 

 

 

 

 


 “아씨, 또.”

 

 또! 또 보인다. 쟤는 그만 좀 보고 싶은데.

 눈으로 김종인을 찾으면 언제나, 항상, 늘, 그 하얀 애가 옆에 서 있다. 매점에서도 그랬고, 식당에서도 그랬고, 사물함 갈 때도 그랬고, 화장실 갈 때도 모조리! 다! 그 애가 껌 딱지 마냥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원래 안 그랬던 것 같은데. 김종인 혼자 잘 다녔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유난히 하얀 애가 옆에 딱 붙어 있다. 그냥 친구인 거 아는데, 나랑 박찬열, 변백현처럼 그냥 친한 친구 인 거 알고 있는데도 기분이 나쁘단 말이지. 아 방금은 어깨동무도 했어? 아씨, 좀 떨어지라고 말하고 싶다. 혼자 있으면 좀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어볼까 했는데 오늘은 진짜 방어벽이 너무 단단하다. 틈도 안주네, 틈도. 그래도, 나중에 집에 갈 땐 혼자 갈 거 아냐. 그때를 노려야지. 옆집이니까 유리하다. 잘 하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옆집 앞을 얼쩡거리면 혜인누나가 나를 데리고 집으로 데려 갈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또 기분이 한결 낫다.

 

 “너 쓰레기통 비우러 안 가냐?”

 

 그래, 그렇지. 청소 시간인데 난 주번이라서 쓰레기통을 비우러 소각장엘 가야된다. 이놈의 쓰레기통. 작년엔 쓰레기 비우는 당번이었는데. 초록색만 보면 내가 아주 지긋지긋해서 이가 갈릴 지경이다. 고상하게 걸레를 쥐고 창틀을 닦던 찬열이가 고갯짓으로 빨리 갔다 오라고해서 인상을 쓰며 교실을 나섰다.

 혼자 투덜거리며 휴지통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가는데, 문득 예전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작년에, 오늘처럼 휴지통을 비우러 소각장으로 갔다가 오는 길에 그 앞에서 김종인이 나한테 고백을 했었지. 아마?

 

 '안녕.'

 

 그때도 지금 만큼이나 짜증이 나서 혼자 빈 쓰레기통을 들고 막 소각장을 나서는데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되게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었다. ‘안녕.’이라고. 친분은 없었지만 유명했던 그 애를 알고는 있었기에 얘가 왜 날? 조금 당황해서 그 애를 올려다 본 기억이 난다. 앞을 가로막아 놓고서, 인사 이후로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서 있던 그 애가 뜬금없이 내게 말했었다.

 

 ‘좋아해.’

 

 내가 잘못들은 건가 싶어서 긴가 민가 했다가, 아무래도 잘못들은 건 아닌 것 같아서 되게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고. 얘가 진짜, 내가 아는 그 유명한 김종인 맞나 싶어서 가슴팍에 달린 명찰과 그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봤었다.

 그리고 그 후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내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너무 또렷하고 자세하게 기억이 남아 있어서 좀 놀랬다. 쓰레기통을 들고 잘 걷다가 그 자리에 멈춰서 있을 정도였다. 어떡하지, 나? 다리에 힘이 풀려서 도저히 못 움직이겠다.

 

 “야! 경수야! 종쳤다. 너 빨리 들어와!”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온 몸을 감쌌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창가를 바라보니 백현이가 작은 창으로 얼굴과 손을 내밀어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왜일까, 백현이의 얼굴이 그 아이의 얼굴로 겹쳐 보인다. 김종인이 나에게로 오라고 손짓 하는 것만 같다.

 오늘의 냉랭한 너의 표정, 이대로 가만히 두면 너는 나를 떠나버리는 게 아닐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염치없지만 그냥 하던 대로 계속 그 아이의 근처를 맴돌며 성가시게 굴고 싶다. 제발 나를 좀 봐달라고 온 몸으로 말하고 싶다. 근데 그건 내 욕심이고, 그 아이를 생각하면 당분간 가만히 두는 게 맞다. 내 생각도 그랬고, 찬열이도 그게 맞는 거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무서운 거다. 고작 하루였을 뿐인데 갑자기 달라진 그 아이의 태도 때문에. 예전에도 날 반기진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무시하진 않았었는데…. 그 아이가 나를 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건, 싫다. 그러면 나는 어떡하라고.


 아침에 출석부를 가지러 교무실에 들렀다 오는 길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그 아이와 마주쳤다. 멍한 표정으로 걷던 그 아이가 나를 보곤 얼른 시선을 돌려버린다. 완전한 정면이라 피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도 결국 오늘도 못 본 척 나를 지나쳐 가버린다. 그 아이 특유의 냄새, 그러니까 그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나도 그 아이를 지나쳐 걸었지만 그 아이의 팔을 잡아 세우고 싶었다. 그리고 말하고 싶었다. 나를 피하지 말라고.

 너는 나를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었나보다.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이정도로 무너질 거였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다. 내가 더 단단해지면 돼.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을 거야.

 

 

 

 

너와 나만의 시간
20.

 

 

 

 “걔 이름이 뭐야?”
 “누구?”
 “김종인 친구 있잖아. 저번에 매점에서 봤던, 걔.”
 “아, 오세훈? 걘 왜?”
 “그냥, 궁금해서.”

 


 그 밀가루 같이 허여멀건 한 애 이름이 오세훈이구나.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던 김종인의 친구. 걘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에 안 든다. 날 보는 시선하며, 김종인 옆에 찰싹 붙어있는 것 하며…아무튼 마음에 안 든다고!

 그래도 전에 보니까 백현이랑은 꽤 친한 것 같아서 차마 말 못하고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아씨, 나 체육복 없어!”

 

 두 시간 뒤에 체육시간인데 미리 갈아입고 바로 나가려고 사물함에서 체육복을 꺼내려는데 백현이가 입술을 삐죽인다. 체육, 늦게 나가면 뒤지게 맞는데. 얜 있는 게 뭐야 대체. 한 소리 하려고 입을 떼는데, 백현이가 ‘아, 나 김종인한테 빌리러가야겠다.’며 사물함 문을 탁 닫는 거다. 순간 번뜩 드는 생각에 그 팔을 얼른 잡았다.

 

  “야, 너 이거 입어!”

 

 그리고 사물함에서 얼른 내 체육복을 꺼내 백현에게 건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냥 던졌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체육복을 받아든 백현이가 넌 어쩌려고? 하면서 묻기에 그냥 씩 웃었다.

 

 “나 김종인꺼 빌리면 되는데?”
 “그거 내가 빌리려고.”

 

 조금 망설이다가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내 말에 백현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갑자기 손에 쥔 내 체육복을 제 어깨에 두르며 웃는다.

 

 “아, 너 걔랑 좀 어색하다 그랬지? 옆집 살고 하니까 친해지려고?”

 

 변명을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만들어준다. 꽤 그럴싸해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백현이 알겠다며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곤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며 화장실로 향한다. 아, 드디어 핑계가 생겼다. 김종인 체육복 내가 빌려야지. 정당한 이유가 있으니까 찾아가도 되는 거겠지. 이번엔, 날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5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 너 어디가?”

 

 복도를 지나는데 반에서 나오던 찬열이 나를 보며 묻는다. 마음은 벌써 5반에 가있는데 걸음이 느려서 조급하다.

 

 “나 체육복 빌리러!”

 

 그 말을 던지고 찬열을 지나쳐 5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아이의 체육복에선 어떤 냄새가 날까. 땀 냄새? 섬유유연제 향기? 혼자 생각하며 슬몃 웃었다. 5반에 들어가자마자 얼른 눈으로 김종인을 찾았다. 전에 한번 와 본적이 있어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아이는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금은, 느슨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 쪽으로 걸어갔다. 아침에 나를 무시했건 말건, 그냥 얼굴만 보면 모든 걸 잊게 된다. 아, 근데 가까이 다가오니 옆에 있던 오세훈도 보인다. 이상하다. 아깐 김종인밖에 안 보였는데.

 성큼성큼 다가가 앉아있는 그 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응?”

 

 둘이서 재밌는 얘기라도 하고 있었는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 애가 나를 올려다봤다.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웃는 얼굴이다. 비웃음 말고, 진짜 웃는 얼굴. 그게 반가워서 나도 웃으며 안녕, 인사했다. 내 얼굴을 바라본 그 애는 또 금세 얼굴이 굳는다. 귀찮게 하려고 온 건 아닌데.

 

 “웬일이야?”


 옆에 앉아있던 오세훈도 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 그래도, 어쩐 일로 왔냐고 물어봐준다. 김종인이 말 걸어주길 바랐는데. 나인걸 확인하자마자 굳은 얼굴로 시선을 피해버리는 그 애를 보자 괜히 왔나 싶은 거다. 그래도, 얼굴을 봤으니 됐다고 생각하면서 섭섭해지려는 마음을 달랬다. 이런 거 하나도 섭섭하지 않다. 난 괜찮다.

 

 “아, 저기 나 체육복 좀 빌려주면 안 돼?”

 

 그렇게 말하고 김종인의 눈치를 살폈다. 내 얼굴이 안 보이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바람에 표정이 보이지 않는 게 아쉽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늘도 여전히 김종인 앞에만 서면 시간이 더디게 흐른다. 없으면 없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괜히 뻘줌해서 옆에 앉은 오세훈을 봤다. 턱을 괴고 앉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오세훈은 앉아있고 나는 서 있어서 걔가 지금 날 올려다보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데 묘하게 기분이 좋다. 그래서 일부러 고개를 더 올렸다. 그랬더니 오세훈이 피식 웃는다. 피식? 내가 그래도 김종인 봐서 그냥 넘어간다. 날 비웃었어.. 역시 맘에 안 든다. 조금 기분이 나빠졌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피했다. 이러는 와중에도 김종인은 답이 없다. 일부러 내 말 못들은 척 하는 건가 싶어서 다시 한번 말을 꺼내려다가, 그냥 입을 닫았다. 그러곤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 책상 근처를 바라보면서 그 애의 입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책상 위엔 교과서가 올려져있다. 다음 시간이 문학인가보다. 그걸 보니 전에 김종인에게 문학책을 빌려줬던 기억이 난다. 되게, 간지러웠는데. 내가 문학책도 빌려줬는데 체육복을 안 빌려주겠어? 설마.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마음이 조급해져온다. 정말 싫다고 할까봐 무섭다. 핸드폰을 꺼내보니 겨우 3분 지났을 뿐인데, 그 3분의 침묵이 내겐 너무 길다. 쉬는 시간 2분 남았는데.

 

 “없어.”

 

 어렵게 김종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와, 진짜 귀한 목소리! 근데 절망적이게도 체육복이 없단다. 없다고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나? 빨리 좀 말해주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냥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다 우연히 김종인의 가방을 봤다.

 

 “어?”

 

 있잖아.
 체육복, 맞는데.

 가방에서 삐져나온 검은 색 바탕에 빨간 줄무늬. 체육복이 분명한데 너는 왜 내게 거짓말을 하는 걸까. 그걸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있는 걸 모르고 없다고 한 것도 아닐테고. 일부러, 나한테 빌려주기 싫어서 거짓말 한 게 되는 거잖아.

 내가 어떻게 해야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모른 척 속아주고 반으로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냐고 따져 물어야할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삐져나온 체육복을 바라보았다. 나를 밀어내려고 작정했구나, 정말로.

 

 “야, 체육복 없으면 체육한테 존나 쳐 맞을텐데. 그거 진짜 아프잖아. 엉덩이 터진다, 터져.”

 

 오세훈의 말에 정신을 차려 김종인을 바라보니 여전히 내 시선을 피하고 있다. 속상하다. 이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냥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 애가 너무 미웠지만 원망 할 수도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더 미웠다.

 

 “어!”

 

 처음엔, 제 3자로 그 아이와 나를 그저 방관하던 오세훈이 분위기가 싸해지자 내 시선을 따라 김종인의 가방을 보더니 곧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래, 가볼게.”

 

 그래서 얼른 몸을 돌렸다. 너무 서운하고 쪽팔려서 더 이상 거기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런 감정,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다. 내가 무리한 걸 요구한 것도 아닌데 너무 하잖아. 삐져나온 체육복과 당황한 오세훈의 표정 그리고 날 쳐다보지도 않던 김종인. 너에게 체육복을 빌리러 갈 거라고 좋아하던 내가 너무 바보같이 느껴졌다. 복도를 걷는데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괜히 눈가를 마구 비볐다.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무거운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옆 반이면서 얼마나 걸린다고. 갈 때는 금방이었는데 돌아올 땐 너무 먼 길이다. 이깟 일로 울지 말자. 그래도 난 남잔데 이런 일로 울면 안 돼! 늦게 가면 혼 날거야. 겨우 힘을 내서 걸었다.

 

 “야, 이거!”

 

 그러는데 누군가 내 팔을 탁 잡아 무언가를 쥐어줬다. 너무 순식간이라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드니 오세훈이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건 체육복.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말도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뭔데?”

 

 아까, 김종인이 대놓고 거짓말 한 걸 봤으니 불쌍해서 체육복 빌려 주는 건가.

 

 “체육복.”
 “그건 나도 알아. 이걸 왜 나한테 주냐고.”

 

 나를 순식간에 아래위로 훑는다. 여전히, 기분 나쁜 표정이다. 나도 너 기분 나쁘거든요. 순간, 짜증이 나서 다시 오세훈에게 체육복을 건네려고 했다.

 

 “김종인이 너 갖다 주래.”

 

 김종인이 나한테 갖다 주라고 했다고?

 손에 들린 체육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꽉 쥐었다. 그리고, 그제야 웃음이 났다.

 

 

 

 

 


 

 

 

 

 

 

 복도에서 혼자 꾸물거렸다. 오세훈이 급하게 반에 들어가고 나서도 우는 듯 웃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체육복만 쥐고 있었다. 결국 늦게 들어가서 출석부로 머리를 맞았다. 아픈 것 보다 기분이 나쁜 구타였지만 그래도 곧 풀렸다. 왜냐면, 김종인이 결국 나에게 체육복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수업시간 내내 계속 웃다가 한 대 더 맞을 뻔 했다. 체육복을 품에 안고 수업을 들었다. 김종인의 체육복에선 내 예상대로 그 아이 특유의 냄새가 베여있었다. 수업이 될 리 없었다. 그래서 내내 김종인 생각만 했다. 나를 바닥으로 떨어트렸다가 금방 하늘을 날게 만든다. 누군가에 의해 감정기복이 이렇게 심해져 본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아까는 진짜 울고 싶었는데 지금은 웃음이 입가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아이가 왜 내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지. 내 얼굴을 보면 흔들리니까 그러기 싫어서 일부러 피하는 게 분명하다. 모질게 내치려면 끝까지 그랬어야지 바보 같게도 결국 나에게 또 빈틈을 보여주고 만다. 진짜, 바보. 난 그런 김종인에게 또 한 번 반한다. 정말로 많이 좋아한다. 이런 너를. 그나저나 체육복 언제 가져다주지? 이걸로 또 얼굴 보러 갈 핑계가 생겼다. 아, 기뻐. 입가에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너 왜 자꾸 실실 쪼개냐?”
 “어! 체육복 빌렸네!”

 

 운동장으로 나가던 중 백현이가 체육복 입은 나를 보며 웃는다. 찬열이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와 백현이를 번갈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난 그저 백현을 향해 웃을 뿐이었다. 다, 니 덕분이야. 진짜 변백현한테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다.

 

 “야, 근데 니 꺼 땀 냄새 심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지도 모르고, 백현이 입고 있던 내 체육복을 들추며 킁킁 냄새를 맡더니 표정이 영 안 좋다. 당연하지. 그거 몇 달을 그냥 사물함에 쳐박아놨는데 냄새가 안 나는게 이상하지.

 

 “깨끗하게 빨아와.”
 “뭐?! 내가 왜!!”
 “너 오늘 내 꺼 입고 땀 흘릴 거잖아.”
 “헐 존나 사기꾼새끼!”
 “뭔 소린데? 도경수 니 껄 왜 변백이 입고 있어?”

 

 우리 둘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찬열이 아직도 잘 모르겠단 얼굴로, 노발대발 하는 백현이를 보다가 나를 보며 또 묻기에 그냥 무시했다. 모르는 게 약이지, 암. 나는 김종인꺼 세탁해서 돌려주고 변백현은 내꺼 세탁해주고! 아 좋다. 좋은 생각이다. 옆에서 시끄럽게 구는 변백현을 가볍게 무시하며 혼자 운동장으로 달렸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죽진 않을 걸?”
 “닥쳐라?”

 

 체육 시간에 기분이 좋아서 여기저기를 쏘다니다 농구공에 머리를 맞았다. 그게 아직도 아파서 집에 가는 내내 머리를 문질렀다. 아프다고 투덜거렸더니, 변백현이 못마땅한 얼굴로 내 머리를 한번 들여다보더니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진다. 저게, 진짜. 니가 농구공 맞아봤냐? 어? 내가 지금 얼마나 아픈지 알아? 아, 머리에 혹 날 것 같아. 박찬열은 오늘도 야자 한다고 학교에 남아있고, 변백현은 오늘까지만 쉬고 내일부턴 공부할 거란다. 그 말에 찬열이와 난 그냥 웃었다. 그 말만 벌써 몇 번짼지 몰라. 차라리 안한다고 하지, 변명은. 쯧. 그리고, 난 너무 기분이 좋아서 오늘 공부는 하루 쉴 거다. 집에 가서 생각 좀 해봐야지. 어떻게 해야 김종인을 마구마구 흔들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 흐흐, 또 바보같이 웃었다.

 

 “야, 아무래도 걔가 다시 나 좋아할 거 같다. 조만간이야.”
 “여신?”
 “아, 어어. 걔.”

 

 백현이는 여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 했다. 저번 그 문자 때문이겠지. 아, 여신은 아니고 남신 정도로 해두자. 알아서 걸러 들어야지. 일일이 설명하긴 좀 그러니까.

 

 “왜? 무슨 일 있었어?”
 “아, 그냥 느낌이 그래.”
 “느낌 좋아하시네. 짝사랑의 적이 뭔 지 알아?”
 “뭔데.”
 “과대망상. 쯧, 병신아. 사랑의 노예가 다 됐네, 노예가 다 됐어.”

 

 그 애가 나 체육복 빌려 줬다고! 첨엔 없다고 했다가, 오세훈이 한 말 때문인지 뭔 진 모르겠지만 결국 나한테 체육복 줬다고.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체육복이 걔 꺼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함정이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가슴만 쾅쾅 내리쳤다. 백현이는 여전히 날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뭐야, 진짜?

 

 “어쩌냐, 우리 경수 바보 다 됐네.”
 “야, 두고 봐, 내말 진짜야.”
 “알겠어. 꿈에서라도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
 “닥쳐, 미친놈아.”
 “헐.”
 “체육복이나 빨아와, 깨끗하게. 알겠냐?”

 

 백현이 나를 노려본다.

 

 “체육복 빌린 놈이 죄지. 아이고, 그냥 종인이 꺼 빌릴걸.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도경수 껄 빌려가지고..엉엉.”

 

 체육복이 든 종이 가방을 끌어안고 우는 척을 하기에 엉덩이를 찰싹 때려줬다.

 

 “야, 버스 왔다. 너, 빨리 가.”
 “엉. 체육복 빨아서 조만간 드림. 간다, 낼 봐!”

 

 버스 정류장에서 백현이를 보냈다. 근데 저건, 버스를 타고 나서도 안에서 밖을 향해 손을 흔든다. 처음엔 무시했지만 계속 그러고 있는 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같이 손 흔들어줬다. 쟨 진짜 귀찮아. 어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버스를 기다렸다. 걸어가도 되는 거리지만 버스 타면 더 가까우니까. 어서 버스가 오기를 바라며 정류장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래도, 변백현 가고 나니까 좀 심심하다. 에이.

 조금 더웠지만, 그냥 체육복을 벗지 않았다. 왜나면 김종인 거니까. 오늘 체육 수업이 없었는지 돌려달란 소리를 안 하길래 그냥 내내 입고 있었다. 아, 원래 돌려달라고 하기 전엔 줘야 되는 거지.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쳤네. 그치만, 김종인 거니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 진짜 오늘은 너무 기분이 좋다. 어제까진 바닥을 쳤다가 오늘 내내 방실방실 웃고 있으니까 박찬열이 병신 같다고 제발 입 좀 다물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지만 그래도 웃음이 안 멈추는 걸 어떡해. 너무 좋은데. 혼자 그 아이 생각을 하면서 체육복을 쓰다듬었다. 아, 이러면 좀 변태 같나? 그러면서 또 웃었다. 아, 어떡하지. 옆에 있는 애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 것 같다. 억지로 웃음을 참으려고 입 꼬리에 힘을 주고 참고 있었다. 아, 김종인의 위력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김종인. 그래, 김종인.

 

 “어?! 김종인!”

 

 말하자마자 나타난다. 나한테 인기 짱 많은 김종인이.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걸어가는 걸 봤다. 그리고, 무작정 팔을 잡았다. 난 되게 반가운데 그 아이는 뭐야? 이런 표정으로 날 본다. 그래도 좋다. 오늘은 나한테 욕을 해도 좋아.

 

 “어디가?”

 

 웃으며 물었다. 귀찮은 듯한 시선이 나에게 닿는다. 내 얼굴을 봤다가, 입고 있는 체육복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온다.

 

 “어디 가는데?”
 “…….”

 

 내가 잡고 있던 팔을 스르륵 놓는다.

 

 “집.”

 

 그리곤, 다시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한다. 평소였다면 그 행동에 상처 받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니가 그러는 이유를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나를 앞서가는 그 아이를 열심히 뒤쫓았다. 

 


 “같이 가자!”

 


 그 아이의 옷을 입고, 그 아이를 쫓는 걸음이 가볍다.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김종인의 옆에서 팔을 잡고 씩 웃었다. 조금씩, 천천히 이렇게 너를 따라 갈게.

 

 

 

 

 

 

 

 

 

 

 

 

 

 

 

***

이렇게 빨리 오면 안되는데... 전 밀당가튼거 할줄 몰라요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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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밀당안하셔두대요ㅋㅋㅋㅋㅋㅋ진짜재밋어서 계속복습하고잇슴니다ㅜㅜ다음편기다려요^^
12년 전
독자1
아싸!!!!! 빨리오세요 저는 좋아요!!!!!!!!빨리!!!!!!오셔도 좋아요!!!!!!!!!!!!!
12년 전
독자2
아뇨 빨리 오세요
12년 전
독자2
이렇게빨리오셔도괜찮아요!!s2빨리오시면엄청좋슴다!ㅋㅋ
12년 전
독자3
또 또 또 빨리요세요......
느므느므 좋아요~~

12년 전
독자4
작가님ㅜㅠ진짜진짜사랑해요ㅠㅠ다이아몬드손이에요ㅠㅠ완전ㅠㅠ
12년 전
독자5
ㅠㅠㅠㅠㅠ 완전좋아여 ㅠㅠㅠㅠㅠ 밀당그런거하지마세요 사랑해요
12년 전
독자6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밀당하지마요 아이구 설렌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좋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포풍눙물!!!
12년 전
독자7
진짜 넘 좋아여 ㅠㅠㅠㅠㅠ ㅠ 어쩜 이렇게 좋지..............?
12년 전
독자8
밀당안하셔도대욬ㅋㅋㅋㅋ아진짜ㅜㅠㅡㅜ작가님사랑함ㅜㅜㅜㅠㅜㅜㅜ
12년 전
독자9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빨리빨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2년 전
독자10
종인이마음도 다이해가고ㅠㅠㅠㅠ감정선이 짱이에요!!!!!!!!
12년 전
독자11
쩐다진찌 대박이야ㅠㅠㅠㅠ
10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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