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보는 두 눈에 무슨 감정이 담겨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한테도 좀 기회를 주면 안 돼?”
머릿속이 하얗다. 그저 이곳에는 너와 나. 둘 뿐인 것 같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한 번만….”
“…….”
“응? 한 번만.”
땀이 차서 축축하게 젖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너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여전히 너의 입은 꽉 다물어져 있다. 초조하다. 애가 타서 미칠 것만 같았다.
“만나보고 아니다 싶으면 차버려도 괜찮아.”
“…….”
“그래도, 난 괜찮아.”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실수를 한 것 같다. 길을 잃고 정처 없이 헤매던 김종인의 눈이 제자리를 찾았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내 목을 졸라왔다. 그 눈빛에 얼어서 꼼짝없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다가, 대답 없이 뒤를 돌아서버린다. 마지막으로 날 향했던 그 애의 눈빛이 차갑도록 시렸다.
너와 나만의 시간
完
눈이 퉁퉁 부었다. 아, 머리가 너무 아파. 집에 오는 길에 아직도 전해주지 못한 체육복을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닿았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걸으면서 서럽게 울었다. 속상하고 미안하고 아파서. 어제 그렇게 나를 뒤로 한 채 멀어져가는 김종인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또, 내가 잘못을 했다. 그 애가 나에게 왜 상처를 받은 건지 알고 있었으면서. 생각 없이 내뱉은 한마디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내 상처를 돌아보기에 급급해서 호기심이 받아준 그 마음이 너무 컸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책임감 없이 받아준 나 때문에 혼자 아팠을 그 아이에게 내가 또 상처를 줬다. 그냥 한 번 만나 봐도 되지 않느냐고, 아니다 싶으면 차버리라고. 그게 말이야…? 그게, 김종인한테 할 소리냐고. 아, 나 정말 진짜 바보 같다.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아들, 어디 아파?”
그러고 있으니, 걱정이 된 모양인지 내 눈치를 살피며 물어오는 엄마에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대답할 힘도 없다. 입맛이 없어서 바로 학교를 가려고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아, 학교는 어떻게 가. 학교 가서 그 애 얼굴은 어떻게 보지. 현관을 열고 나서기가 무섭다. 그냥 집 안에 틀어박혀서 숨죽인 채 있고 싶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비를 맞아서인지 머리가 깨질 듯 아픈데. 열도 좀 나는 것 같고, 몸 상태가 별로 좋지가 않다. 그 핑계로 학교 가지 말까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야. 그래도 피하는 건 아니잖아. 오해라고, 내가 말 실수를 했다고 말 해야겠다.
“아프면 조퇴하고 와.”
“어차피 토요일이라서 빨리 마쳐, 괜찮아.”
“병원 꼭 가보고.”
“응. 갔다 올게요.”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다. 체육복이 담긴 종이 백을 다시 손에 꽉 쥐며 현관문을 열었다.
一
포기할까 생각도 안 해봤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잘못한 게 물론 있다고는 하지만, 나도 그에 못지않게 상처를 많이 받았으니까. 나도 사람인데, 아무리 좋아해도 내가 힘든데 놓고 싶은 마음이 왜 안 들었을까. 나를 무시하고, 못 본 척하고, 말을 걸어도 못들은 척 하는 그 애를 볼 때마다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굴만 보면 웃음부터 나는데 어떡해. 힘들었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다. 오늘이 토요일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빨리 마치니까 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힘이 없어서 책상에 고개를 박고 가만히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조금, 지친다.
전에, 백현이가 그랬던 것처럼 혹시 열이라도 나는가 싶어서 이마에 손을 짚어봤다. 좀 뜨겁다. 머리도 울리고, 기침은 안 나는데 콧물 때문에 조금 괴롭다. 엎드려 있었더니 코가 막혀서 숨을 못 쉬겠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거울을 봤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진짜 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추했다. 얼굴이랑 눈이 형편없이 부어있었다. 그런데다 콧물까지…. 아, 김종인한테 가서 사과해야 되는데. 도저히 이 꼴로는 못 가겠다 싶었다. 게다가, 김종인이 나를 만나 줄지도 의문이다. 안 봐주겠지? 내가 그 애라도 싫을 것 같다. 당연히 싫지. 어제 그 말은 김종인의 상처를 들쑤시는 꼴 밖에 안 되는 거였다. 얼마나 허탈하고 허무할까. 난 그저, 그만큼 절박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인데. 아, 진짜 바보. 휴지로 코를 막으며 머리를 한 대 세게 쥐어박았다. 맞아도 싸.
“뭐야, 너 아침부터 왜 이렇게 골골 거려?”
박찬열이 자기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내게 물었다. 의자를 빼내어 앉으면서 고개를 내 쪽으로 가까이 하는데 피했다. 가까이서 보면 안 돼. 추하다니까.
“헐. 눈 봐, 붕어야?”
피하는데도 기어이 가까이 다가온 박찬열이 퉁퉁 부어있는 얼굴을 손으로 붙잡으며 이리저리 살피더니 쯧쯧, 혀를 찬다. 내 얼굴을 잡은 찬열의 손을 밀쳐냈다. 아, 콧물 때문에 미치겠네.
“너 어제 누구한테 맞았냐?”
“그런거 아니야.”
“그럼, 울었어?”
“…….”
“뭔 일인데.”
“안 울었거든?”
“뭔 일 있었지?”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어제 상황을 모두 설명하기엔 힘이 빠진다. 그걸 다시 떠올리는 것도 지치고, 얘기를 해줘봤자 박찬열은 나한테 욕을 할 게 분명하니까. 내 편은 아무도 없어. 하긴, 제 3자 입장에서 봐도 내가 잘못했는걸. 끈질기게 물어오는 찬열이를 무시하면서 코를 훌쩍였다. 앞으론 비 맞지 말아야지. 이게 무슨 청승이야. 차였는데, 아프기까지 하고….
“차였냐?”
박찬열이 눈치를 보며 묻는다. 그렇게 생각 안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그래, 나 차인 거 맞지? 차인 거 맞는 것 같다. 아무런 대답을 듣진 못했지만 그 애의 눈을 보고 감이 왔어. 딱, 느껴지는 거야. 얘가 지금 무슨 마음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 용기를 내서 고백했는데, 마지막 한마디 때문에 망쳤어. 흔들렸는데, 분명히 나를 보고 무너질 것 같은 눈을 했는데. 그 말 때문에 바로 뒤돌아 가버리더라. 다시 어제의 그 눈빛을 떠올리자 마음이 먹먹해진다.
오늘 나 왜이래. 원망하고, 자책하고, 미안해하고. 좀 병신 같다.
“아니야, 그런 거.”
눈이 따갑다. 여기서 울고 싶진 않아서 손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그럼, 어디 아파?”
“응.”
“아 이 찌질이 새끼 춥지도 않은데 뭔 감기야… 약은 먹었냐?”
내가 입을 닫아버리자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박찬열은 눈치가 빠르니까 내가 대답하고 싶지 않은 걸 알아챈 모양이다. 다행이다. 어찌됐든 몸이 아픈 건 맞으니까, 아프냐는 찬열의 물음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약은 먹었냐는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더니 박찬열이 또 혀를 차는 게 아닌가.
“보건실 갈래?”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니야.”
“약 타다줘?”
“괜찮아.”
눈물 대신 콧물이 마구 흐른다. 휴지로 코를 감쌌다. 박찬열이 나한테 새로 휴지를 건네준다. 그걸로 새로 코를 막고 있는데, 박찬열이 내 머리를 스윽 쓰다듬는다. 뭐야 징그럽게. 퉁퉁 부은 눈으로 찬열이를 봤다. 그랬더니, 박찬열이 어깨를 으쓱한다.
“너 이러고 있으니까 갑자기 생각나네, 잊고 있었는데.”
“뭐가?”
“너 예전에 다쳤을 때.”
“내가 다쳐? 언제?”
“1학년 땐가, 너 체육하다 넘어져서 무릎 까진 적 있었잖아.”
다친 게 하루 이틀 일이어야 기억하지. 조심성이 없어서 여기저기 상처를 많이 가지고 있다. 혼자 멍하니 길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문에 머리 박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딘가에 긁혀있고. 언제를 말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머리를 굴려 생각하다가 진짜 생각이 안 나서 그냥 박찬열을 바라봤다. 얼른, 얘기나 더 하라고.
“그때 너 도서관에 책 반납하러 간 사이에, 김종인이 달려왔었는데….”
“…뭐라고?”
처음 듣는 얘기다. 놀라기도 놀랐고, 그 아이의 이름에 반사적으로 눈이 동그래졌다. 부어서 다 떠지지는 않았지만.
“나한테 너 어디 있냐고 되게 다급하게 찾더라고. 솔직히 처음에 너한테 걔가 고백한 거 들었을 땐 장난이겠지 싶었거든? 그냥 친해지고 싶은데 다가가는 방식이 좀 다르네. 뭐,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
“그때 그 표정보고 알았지.”
“…….”
“아, 얘가 진짜 도경수를 좋아하는구나.”
“…….”
“진짜, 내가 다 마음 아프더라.”
어떡하지? 나, 진짜 어떡하지. 종인아. 나 진짜 어떡해….
찬열이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실컷 울어놓고 또 눈물 났다. 진짜 울고 싶은 건 니가 아닐까. 아, 미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옆에서 찬열이가 날 보고 있었는데도 그냥 펑펑 울었다. 어제처럼, 주위 사람의 시선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一
“밀당해, 밀당 몰라? 밀고 당기기.”
아무것도 모르는 백현이 다가와서 어젠 어떻게 됐냐고 내 옆구리를 푹 찌르며 묻기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대충 둘러대고 말았다. 다행이다. 아침에 내가 우는 걸 본 게 박찬열 뿐이라. 그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되게 쪽팔리긴 한데, 그런 나를 알고 찬열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해줘서 마음이 놓인다. 늦잠을 자서 지각한 백현이 담임한테 불려가서 몇 대 맞고 오자마자 나한테 달려왔다.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 가 붓기가 많이 빠졌다. 눈가가 빨갛긴 하지만 변백현이 눈치가 없어서 다행이다. 훌쩍, 콧물이 나서 휴지로 코를 막으며 백현이를 바라봤다.
“지금까지 실컷 당겼잖아, 이젠 밀어내야 너한테 온다?”
밀당이고 뭐고, 지금 그런 거 할 때가 아니야. 그냥 빌어야 된다고. 그래도 받아줄까 말까 한데.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시덥지 않은 소리를 해대는 백현이를 보고만 있었다. 상대해주면 더 귀찮아지니까.
“어? 그 표정 뭐야! 내 말 안 믿냐?”
“믿어.”
“진짜? 믿어야 돼. 그래야 자다가도 떡이 생겨.”
“뭔 소리야.”
“암튼! 이제부턴 좀 밀어내라고. 봐도 못 본 척 하고, 먼저 말 거는 것도 하지 마.”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라니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진짜 밀려나면 어쩌려고?”
“…음,”
“어쩌냐고, 그러면.”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아, 짜증나. 콧물 나고 머리 아파 죽겠는데 괜히 와서 헛소리야. 더 들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서 백현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버렸다. 그랬더니, 백현이가 박찬열 자리로 가서 도경수 왜 이렇게 까칠하냐고 찡찡거린다.
“니가 헛소리를 하니까.”
“내가 괜히 그래? 지 도와주려고 그런 거지!”
“도와주긴 개뿔.”
두 멍청이가 투닥 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서 책상에 엎드렸다. 콧물이 찔끔찔끔 계속 나오지만 그래도 그냥, 엎드려 있고 싶었다.
“야, 오늘 토요일이냐?”
“어. 토요일이다.”
“나 오늘 김종인네 가서 놀기로 했다? 부럽지?”
“그걸 내가 왜 부러워해야 되는데.”
내가 더 잘하면 예전의 종인이로 돌아 올 것 같았는데 어제 날 보던 그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슴이 답답하다. 그 애도 이렇게 힘들었을까? 나 완전 개새끼네. 나쁜 새끼였어. 그 애를 위해서 내가 포기해야 되는 건가. 그런 건가…. 아침에 찬열이한테 들은 얘기도 그렇고, 얼굴을 보지 않아도 이름 하나에 가슴이 떨리는데. 그래도 내가 너 포기해야 돼, 종인아? 대답 좀 해줘.
그나저나, 방금 백현이가 김종인 어쩌구저쩌구 한 것 같은데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일어나서 다시 물어볼까 하다가 관뒀다. 그냥 그 이름 하나에 또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一
자꾸 콧물이 나서 병원에 가려다가 말았다. 그래서 그냥 집에 와서 비상약을 찾다가 감기약을 발견했다. 얼른 입 안에 털어놓고 방에 가서 침대에 누워서 두 시간 정도를 잠들어있었다. 자고 일어나니 몸이 좀 가벼워진 것 같다. 다행이다.
도저히 용기가 안 났다. 김종인 얼굴 보고 전해주려고 했는데, 겁이 나기도 하고 또 미안한 마음에 5반으로 찾아갈 용기가 안 나서 그대로 체육복을 가져오고 말았다. 다시 집에 들고 가자니 뭐해서, 집에 오는 길에 옆집 현관문 앞에다 걸어놓고 왔다. 뭐라도 적어놔야 될 것 같아서 그 집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뭐라고 쓸까. 미안하다고 써야 되나, 아니면 고맙다고 써야 돼? 포스트잇을 손에 쥐고 계속 고민하다가 끝내 고맙다고 적었다. 그리고 문고리에 걸어놓은 종이 가방에 붙여 놓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벌써 해가 졌는지 밖이 어둡다. 자는 동안 땀을 흘린 모양이다. 이마가 젖어있다. 손을 들어 땀을 닦았다. 김종인은, 집에 있을까. 체육복 봤겠지? 팔이 욱씬 거려서 내려다봤더니 멍이 들어있다. 어제 잡혔던 흔적이다. 아프다 싶었는데 결국 멍이 들고 말았다. 팔에 선명하게 난 푸른 멍 자국을 바라보다가 불이 켜진 김종인의 집을 바라보았다.
“어, 엄마. 오늘 늦는다고? 아빠는? 알았어.”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오늘 아빠랑 밖에서 저녁 먹고 늦게 들어 갈 거라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혼자서 저녁 먹게 생겼네. 배는 안 고픈데, 뭐라도 먹어야 될 것 같아서 침대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밥솥을 열어보니 밥이 없다. 밥하기도 귀찮고 시켜먹을까? 1인분인데 배달이 되려나, 배를 손으로 문지르다가 그냥 소파에 앉아 티비를 켰다. 아, 밥 안 먹을래. 귀찮다. 리모컨을 손에 들고 무의식적으로 채널을 돌렸다. 티비가 눈에 잘 안 들어온다. 전에, 그 아이의 집에서 이랬던 적이 있었는데. 김종인이 지금 나처럼 이러고 있었지, 아마. 걔는 밥 먹었을까. 오늘도 학원가는 날인가? 아니었던 것 같다. 집에선 뭐하고 지낼까. 집에서도 공부하려나, 재미없게. 뭘 하든 그 애 생각만 난다. 큰일 났다. 이번에 성적 되게 많이 떨어 질 것 같다. 성적 올려서 엄마한테 학원 보내달라고 해야 되는데. 방에 들어가서 공부나 할까하다가 관뒀다. 티비도 안 보이는데 공부가 될 리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티비에선 예능 프로그램이라도 하는 지 시끄럽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데, 난 웃기지도 않고, 재미도 없고. 짜증이 나서 채널을 돌렸다. 그러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전화 왔나?
“뭐야.”
액정에 모르는 번호가 떠있다. 모르는 번호는 안 받는 주의라서 그냥 탁자위에 엎어버렸다. 울리던 진동음이 뚝 끊긴다. 곧이어 또 진동이 울리기 시작한다. 아, 뭐야 진짜. 몇 번을 무시했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고 계속 전화가 오는 거다. 왜,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이건 받아야 될 것 같다는 느낌. 네 번째 전화가 왔을 때, 그 느낌 때문에 전화를 받았다. 장난 전화면 끊어버려야지.
“여보세요.”
-어, 도경수?
“누구세요.”
낯선 목소리다.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상대방이 ‘나, 오세훈이야.’라고 말한다.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힘이 쭉 빠진다. 뭐야, 얜. 오세훈은 김종인 친구 아니야? 그것도 그냥 친구 아니고, 나 싫어하는 친구. 그나저나, 얘가 왜 나한테 전화를 한 걸까 이해가 안 간다.
“왜?”
그래서 물었다. 나한테 왜 전화했냐고. 오세훈의 대답만 기다리는데 주변이 꽤 시끄럽다. 웅성거리는 여러 개의 목소리가 섞여 들린다.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겠고, 내가 이걸 왜 듣고 있나 싶어서 끊으려고 했다.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오세훈이 급하게 말한다. 나보고 집 앞으로 좀 나오란다. 뭐지? 얘 진짜 뭐야? 알 수가 없어서 멍하게 앉아서 눈만 굴렸다. 왜그러냐고 물으려는 찰나에 전화가 뚝, 끊긴다. 타이밍이 참 거지같다.
“얘 진짜 뭐야?”
끊긴 전화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一
“헐.”
결국 나왔다. 나왔더니, 오세훈이 양 옆에 김종인과 변백현을 부축하고 서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놀라서 입을 크게 벌렸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그저 놀란 표정으로 말 없이 눈만 굴려 그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고 있는데 오세훈이 엄청 짜증난 표정으로 나에게 김종인을 넘겨준다. 넘겨준다? 김종인을??
“야, 뭐해. 나 지금 엄청 무겁거든?”
“아, 어어.”
왜 나한테? 라고 생각하면서도 얼떨결에 받았다. 김종인의 허리를 부여잡고, 한쪽 팔을 들어 내 어깨에 걸쳤다. 훅 다가온 그 아이에게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아, 술 마셨나보네. 일단 잡긴 잡았는데 다음엔 뭐, 어떻게 하라고?
“어! 우리 경수네? 경수, 하이!!”
“아, 좀 가만히 있으라고.”
축 늘어진 채 오세훈에게 기대있던 백현이 나를 보고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쟤도 취했나보네.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으니, 백현이 나에게 오려고 손을 뻗는데 오세훈이 그 팔을 잡아 내린다.
“아, 이거 놔! 나 경수한테 갈 꺼거든?”
“변백현 이게 진짜.”
“경수야 나 좀 구해죠! 지금 악마가 나를 잡고 안 놔준다. 엉엉.”
오세훈이 저지하자 백현이 시끄럽게 굴면서 날뛴다. 그러면 오세훈이 아예 입을 막아버린다. 입이 막힌 상태에서 끝까지 뭐라고 웅얼거리던 백현이 곧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 상황을 그냥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축 늘어진 백현이를 고쳐 잡던 오세훈이 한 손으로 이마에 땀을 닦으며 내게 말한다.
“김종인 데리고 바람 좀 쐬고 와라.”
“내가?”
“그럼 니가 하지, 내가 할까?”
“…….”
“아, 참고로 걔 지금 존나 취했다.”
말을 마친 오세훈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백현이를 질질 끌고 김종인네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 와중에도 내게 기댄 김종인은 쌕쌕, 숨소리만 내고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오세훈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축 늘어진 김종인의 허리를 고쳐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동네 한 바퀴나 돌아야겠다.
내게 기댄 김종인이 무겁다. 한 쪽 어깨가 저려왔다. 진짜, 어지간히도 많이 마셨나보다. 얼마나 취했으면 나한테 기대고 있을까.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다. 근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종인이 차라리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만약, 김종인이 정신을 차리면 더 이상 나한테 기대지도 않을 거고, 또 도망 가버릴 테니까. 무거워도 참을 만 했다. 애가 자꾸 힘없이 비틀거리기에 어깨에 두른 팔을 꽉 잡았다. 뜨겁다.
“어? 이게 누구야?”
“정신이 좀 들어?”
“도경수네, 도경수.”
한참을 그렇게 걷기만 했을까, 조금 지쳐서 잠시 쉬고 있는데 김종인이 정신을 차렸다. 발음이 꼬여서 엉망인 상태로 나를 가리키며 말을 걸어온다. 정신을 차렸지만 술을 완전히 깬 것 같지는 않다. 어제 그런 이후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김종인은 또 처음이다. 게다가, 이렇게 가까이 얼굴을 마주한 건 진짜 처음이라서 조금 떨렸다.
“응. 나, 도경수. 술 많이 마셨어?”
“아, 나 머리가 너무 아파.”
김종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순간, 진하게 풍겨오는 그 아이 특유의 냄새에 놀라서 흡, 하고 숨을 들이켰다.
“…어지러워. 어디 가서 좀 앉자.”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비틀거리는 그 아이를 더욱 세게 붙잡으며 근처 벤치에 앉았다. 내 어깨 말고도 기댈 곳이 생긴 김종인이 스르륵, 내 목을 감았던 팔을 풀고 나에게서 멀어진다. 내 몸은 둘러싼 따뜻한 온기가 사라졌다. 멀뚱멀뚱, 그 아이를 바라봤다. 인상을 쓰며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짚고 있다.
“내가, 해줄까?”
무슨 용기였을까. 그 아이의 손을 잡아 내리고선 움푹 들어간 관자놀이 부근을 내 손으로 꾹꾹 눌러주었다. 도를 넘어 섰을지도 모르는 내 행동에, 그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을 감고만 있다.
“있잖아,”
“…응.”
몇 번을 꾹꾹 눌러주고 있는데, 갑자기 김종인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한 그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조금 전보다는 더욱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 애의 얼굴에 있던 내 손을 내리고선 나도,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 아이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인다.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겁나.”
“…….”
“니가 나한테 또 상처 줄까봐.”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하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는 너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깊은 한숨을 쉰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무섭더라.”
“…….”
“그냥, 지나간 일이잖아. 어떻게 보면, 너한테는 아무 것도 아닌…그런 일이잖아.”
“…….”
“근데 나 혼자서 이렇게 끙끙 앓고 있는 건가? 진짜, 도경수한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인건가. 나 혼자 뭐 한 거지? 막, 그런 생각이 들었어.”
“…….”
“아, 내가 지금 취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
“근데 있잖아,”
“…….”
“내가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김종인의 새카만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자니,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조금 전엔 상처받은 눈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 표정이다. 마치, 울 것 같은 그 표정. 전에도, 어제도 한번 봤던 그 표정.
“…그런데도,”
“…….”
“내가….”
“…….”
“…너한테,”
갑자기 김종인이 입술을 깨물더니, 눈을 감아버린다. 말하는 와중에 감정이 복받쳤는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혔는데, 목울대가 울렁이는 게 보였다. 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 이 상황이, 이 순간이 꿈만 같다. 믿기지 않는다. 내가 너의 옆에 앉아있는 게 믿기지가 않아. 니가 못하겠으면, 내가 할게. 내가 하면 돼.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김종인에게 말했다.
“어젠 미안해. 내가, 말실수를 했어.”
“…….”
“그 만큼 절박하다는 말이었어.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진짜, 미안.”
이런 거구나. 말 하면서 감정이 복받치는 게 이런 거였어.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땅을 한번 바라보았다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봤다가,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다시 김종인에게로 향했다.
“나 너 더 많이 좋아 할 거야.”
여전히 그 애는 말이 없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래.”
“…….”
“그땐…, 니가 나한테 져 줬으니,”
“…….”
“이번엔 내가 너한테 져줄게….”
무릎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져있는 그 아이의 손을 꽉 잡았다. 따뜻하다.
“나…, 진짜 너 좋아해. 종인아.”
드디어 끝이 났다. 잡은 손을 더 세게 잡으며 김종인의 눈치를 살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빨리 뛰는데, 김종인은 여전히 말이 없다. 얼른, 눈을 뜨고 나를 봐주었으면 좋겠다. 조금 전처럼 나한테 목소리를 들려줬으면 좋겠다. 어제보다 더 초조하다. 또 손에 땀이 난다. 그 아이의 입이 떨어지기를 한참을 기다렸다. 감은 두 눈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더 가까이했다. 코앞에 김종인의 얼굴이 있다. 어떡하지, 너무 떨려.
“…….”
김종인이 입을 벌린다.
“김종인.”
“…….”
“종인…아?”
아무래도 이상해서 이름을 부르며 손으로 그 아이를 툭 찔렀다. 쌕쌕, 고른 숨소리가 들린다. 설마. 아닐 거야…. 에이, 설마.
“야, 김종인?”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는 그 얼굴에, 허탈해서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며, 혼자 웃었다.
一
그렇게, 주말이 지나갔다. 뭘 했는지 모르겠다. 자고 있던 김종인을 깨우기가 싫어서 다시 일으켜 세워 집까지 데려다주곤 집에 와서 뻗었었지. 진짜 심장이 터져서 미칠 것 같았는데 자고 있었어. 그, 중요한 순간에. 다 기억이 난다. 그 아이도 기억 할까? 잠들기 전엔 자기가 한 말도 있는데, 기억 했으면 좋겠다. 아냐. 기억 못해도,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 앞에 서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인다. 그 뒷모습이 너무 익숙해서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집 앞을 지키고 있던 누군가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보인다. 김종인이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얼른 뛰쳐나가 그 애 앞에 섰다. 그랬더니 그 애도 날 바라본다. 말없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한참을 그랬을까, 그 애가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말했다.
"학교, 같이 가자."
그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억 못할 줄 알았는데…, 다 기억하는구나. 걱정했는데, 혹시나 어제 일을 까먹으면 어쩌나 하고.
그 애를 보고 웃었다. 김종인이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내 볼을 세게 꼬집었다. 아프다. 꿈이 아니다.
“응.”
그 애가 드디어 나를 향해 웃어주었다.
1부
fin.
***
이거 뭐 참.... 완결까지 그냥 초스피드네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여기서 말해도 되나 싶은데,
어떻게 쫓아오셨지?!! 진짜 신기해요 와우...
그래서 쫓기든 완결편 올리고 떠납니다!
조만간 달달 터지는 2부 들고 찾아올게요....
눈만 깜빡이면 금방 찾아올지 몰라요. 방심하지마세욬ㅋㅋㅋㅋㅋㅋㅋㅋ
감사해요 사랑해요 하트!!!!
아참 그리구 암호닉 신청하셔도돼욯ㅎㅎㅎㅎㅎㅎ
조심스럽게 제 마음을 전달해봅니다..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