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어, 오빠 거기서 뭐해.
정한) ....아. 그냥 잠이 잘 안와서.
새벽에 물을 마시려 내려온 여주가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는 정한을 향해 묻자, 정한은 옅게 웃어보이며 얼버무렸다.
정한) ..여주는 왜 내려왔어?
여주) 아. 목말라서 잠깐..
정한) 다시 올라가서 얼른 자. 새벽 네시다.
여주) ...오빠도 얼른 들어가서 자.
정한) ...그래.
여주가 정한을 쳐다보다 부엌으로 들어가고 정한은 다시 웃음을 지워낸 채 눈을 감고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금방 부엌에서 나온 여주는 그런 정한을 보곤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가 곧 제 방으로 올라갔다.
새벽 빛을 받으며 정한은 어두운 낯빛을 한 채 한숨을 내쉬고, 한참을 있다가 정한도 방으로 올라갔다.
승철) 누구?
한솔) 정한이 형. 하루종일 기운이 없어.
지수) ..아, 오늘 28일인가?
명호) 응.
지수) 내일 기일이네, 정한이네 누나.
한솔) ...아. 날짜가 벌써 그렇게 됐나.
한솔의 물음에 지수의 시선이 벽에 달린 9월 달력으로 향하고, 곧 소파에 앉은 모두가 정한이 저기압인 이유를 알아차렸다.
지수) 잠도 제대로 못잤겠지.
지훈) 좀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승철) ..그러게. 애가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는..
명호) 어쩔 수 없지, 뭐.
명호의 말을 끝으로 별 말을 나누지 않던 아이들이었고, 곧 한솔이 티비를 켜자 그 시선들이 티비로 옮겨졌다.
자신의 방에서 노트북을 두들기던 여주는 빠르게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곤 제 탁상 달력을 바라봤다. 9월 28일. 여주의 고개가 기울어지고, 그 옆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진 29일로 시선을 옮기며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정한이 왜 그렇게 멍했는지 알아차린 듯 했다.
여주는 노트북을 덮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토독 토독 두드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정한과 지훈의 방으로 향했다. 열려있는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여주가 침대에 반쯤 누워있는 정한을 바라보고, 휴대폰을 만지던 정한이 여주를 보며 적잖게 웃었다. 왜?
여주) 아니 그냥 뭐하나 해가지고..
정한) 그냥 휴대폰하지 뭐..
정한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자연스레 방을 나와 소파에 앉았다. 따라 여주가 정한의 앞에 앉고, 민규와 석민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게임 소리가 3층 거실을 가득 채웠다.
여주) 나랑 카페갈래?
정한) 카페?
여주) 그냥 과제나 할까 해서. 분위기 전환겸으로.
정한) ...글쎄.
여주) 음 그럼 영화볼까?
정한) ...그것도,
여주) 나랑 놀자.
이렇게 있지말고.
여주의 권유에 정한은 그저 떨떠름하게 웃어보일 뿐 전부 거절의 의사를 표했고, 여주는 테이블에 놓인 큐브를 들어 의미없이 돌려대며 정한을 향해 덤덤히 놀면안되냐고 물었다. 둘 사이에 한참 긴 정적이 자리하고, 정한은 여주가 들고있던 큐브를 부드럽게 앗아가더니 말했다.
정한) ...오늘말고 내일은 어때.
여주) 어?
정한) 우리 오늘말고, 내일 놀자.
내일 시간 비워둬, 여주야.
민현) 작년에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았잖아.
안그래?
여주가 방으로 들어가고, 거실에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정한의 소식을 들은 민현이 정한을 찾았다. 여전히 3층 거실 소파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있던 정한이었고, 민현은 그런 정한을 불렀다. 지수방으로 향한 둘은 테라스에 나란히 앉았고, 먼저 입을 열은 건 민현이었다. 민현의 물음에 정한은 한참 뜸을 들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정한) 재작년에 여주를 만났고, 작년엔 여주를 자주 봐서 괜찮았지.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여주가 우리 누나를 닮았으니까.
민현) ..올해도 있잖아.
정한) ............
있지. 있는데,
정한이 길게 마를 띄우고, 민현은 그런 정한을 기다렸다. 가을의 노을 빛이 둘을 비추고 이에 민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빛을 가림과 동시에 정한이 말했다.
정한) 봄 노을이랑 가을 노을이랑 비슷한거 알아?
민현) ..뭐?
정한) 여주가 동아리실에서 자해했던 날,
..그 날도 이랬는데.
민현) ..........
정한의 말에 천천히 손을 내린 민현이 적잖게 한숨을 내뱉었고, 정한은 고개를 푹 숙여 손장난을 치더니 민현을 향해 말했다.
정한) 누나 기일 전 날엔 누나 꿈을 꿨거든?
누나가 죽기 전에 나한테 많은 말을 했었는데 딱 그 날만 꿈을 꿔.
원래대로면 그냥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누나를 내가 그냥 보내는데, 꿈에서 만큼은 내가 누나를 붙잡는 그런 꿈.
민현) ............
정한) 여주를 만났던 재작년, 그리고 작년엔 누나 곁에 여주가 있는 꿈을 꿨었어. 그리고 마지막엔 여주가 날 향해서 이렇게 말했어.
..오빠, 언니 잘 지낸대.
정한이 제 손바닥에 얼굴을 푹 묻고 또 다시 한참을 말이 없었다. 마치 울음을 삼키는 사람처럼 목울대가 움직였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정한을 위로하듯 앞머리를 옅게 흔들고, 정한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정한) 근데 그런 여주가 무너지는 걸 보고나서 오늘은,
..여주가 없어지는 꿈을 꿨어.
민현) ..........
정한) ..나 오늘도 자는게 무서워.
...너무 두려워.
여주와 영화를 보고 카페에 한참을 앉아있던 정한이 시계를 보더니 여주를 향해 말했다.
먼저 들어갈래?
여주) .........
정한) 나 어디 좀 들렀다가 갈게.
여주) 으음...
정한의 말에 여주는 노트북을 탁 덮고 턱을 괸 채 정한을 빤히 쳐다봤고, 곧 의자에 몸을 기대더니 옅은 미소를 입에 걸친 채 물었다.
여주) 작년에도 내가 물어봤지?
정한) ..뭐를?
여주) 같이 가줄까, 하고.
정한) ..........
여주) 먼저 가라고 권유하는 거 보니까, 올해도 같은 대답일 것 같은데.
맞지?
정한) ...응.
여주) ...그래. 존중해, 나는. 이유가 있겠지. 그치?
정한이 웃으며 짧게 답하자 여주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곧 노트북과 제 짐을 가방에 넣으며 한 쪽 어깨에 걸쳐메더니 휴대폰을 집고서 말했다.
여주) 대신 꼭 같이 가고싶으면 말해주는거야. 알지?
정한) 그럼.
여주) ...........
정한) 생각해줘서 고마워, 항상.
정한의 말에 여주가 어깨를 으쓱 거리고서 먼저 카페를 빠져나갔다. 유리창을 통해 여주가 제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까지 보던 정한은 거의 다 비워져가는 커피잔을 들어 마셨다. 탁. 하고 잔을 내려놓은 정한은 어둑어둑 해진 창 밖을 바라보다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카페에 앉아있던 정한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누나의 납골당 앞에 섰고, 아무말 없이 제 시선과 수평한 납골당을 바라봤다. 정한의 휴대폰에 찍힌 시각은 매년마다 일치했다. 9월 29일, 21시19분. 마주해야하는 현실을 무시하고 미루고 미루다가 느지막이 납골당에 발을 들이는 정한의 오랜 습관 탓이었다.
올해도 데려오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데려올 수가 없었어. 항상. 누난 왜 그런지 알아? ..난 여전히 모르겠어. ..단단한 나무라고 믿었는데, 기대니까 나무껍질들이 떨어지면서 기울어지는 순간을 봤을 때, 누나는 그 기분을 알까.
...누나 괜찮다고 잘 지낸다고 전해준 여주가 무너졌어. 민현이도, 지훈이도 모두를 일으켜주던 여주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누나를 잃었던 순간처럼 그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으면서도 내가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어.
누나, 여주를 만나고 나서부터 누나를 만나기 전에 악몽을 안꿨는데, 여주가 무너지는 걸 보고 나서는 여주를 자꾸 잃는 꿈을 꿔. 여주가 자꾸 사라져. 오늘도 그런 꿈을 꿨어. 눈을 뜨는데 여주가 없어. 여주가 자꾸.. 사라져. 누나.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하면 여주를 살릴 수 있어, 어떻게 하면.
정한이 무릎꿇고 주저앉아 양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누나가 죽은 뒤 매년 찾아오는 납골당이었지만, 올해가 가장 힘든 날이라고 정한은 생각했다.
오후 열한시 반이 넘어가는 시각 정한은 느지막이 도어락을 열었고, 제 방을 올라가려다 켜져있는 부엌 불에 발걸음을 돌려 부엌으로 향했다.
정한) 안자고 뭐해.
민현) ..너 기다렸지, 내가 이 시간에 안자고 뭘하겠냐.
정한) ..휴대폰도 안하고, 노트북도 안하고. 물만 마시면서?
민현) 덕분에 멍도 때려보고 좋지 뭐.
민현이 식탁에서 일어나 물 컵을 싱크대에 내려놓더니 정한의 얼굴은 보곤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정한이 한껏 민현을 째려보며 뭐. 하고 톡 쏘듯 물었고, 민현은 정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민현) 뭔가 오늘은 느낌이 안좋아서 내가 숟가락 두개 냉동실에 넣어뒀어.
정한) ...고맙긴 고마운데, 많이 부었냐?
민현) 말이라고.
정한) .........
민현) ...너 이번에도 여주 안데려갔더라.
부엌에 마주보며 서있는 둘이었고, 민현의 물음에 정한은 고개를 살짝 끄덕거렸다.
정한) ...안데리고 가길 잘했지. 눈이 이렇게까지 부었는데.
민현) 하긴. 여주한테 그렇게 흉한 모습을 보이면 좀 그렇긴 하지.
정한) 야. 흉해봤자 얼마나 흉하다고.
민현) 많이.
정한) ...그래?
정한과 민현이 웃음을 터뜨리고, 후에 민현은 올라가자는 듯 손을 휘저었다. 곧 민현이 먼저 부엌을 나가자 고개를 숙였다가 민현을 불러세우는 정한에 민현이 뒤돌아 정한을 바라봤다.
민현) 왜?
정한) 어떡하지.
민현) 뭘.
정한) 불안해.
민현) ............
정한) 자꾸 이상한 꿈을 꾸니까,
그 꿈을 계속 반복해서 꾸니까,
찝찝하게 불안해.
epilogue
부엌에서 올라온 정한은 씻고 방으로 들어가려다 여주의 열린 방문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1층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계단으로 시선을 옮기고, 곧 화장실에서 새어나온 불빛과 여주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서로를 마주봤다.
정한) 안잤어?
여주) ..아니, 잤어. 근데 잠깐 목말라서..
정한) ..아. 목소리 들으니까 진짜 잤네.
여주) 앟ㅎ.. 엄청 잠겼엏..
정한) ..잠 더 깨기전에 얼른 자.
여주) ..응. 잘자.
여주가 방으로 들어가려는 듯 어기적 어기적 제 방으로 향하고, 그런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한은 터벅 터벅 걸어가 여주의 손을 잡았다. 잡힌 손에 여주가 정한을 올려다 보고, 정한은 여주의 작은 한 손을 큰 두 손으로 소중히 잡아 쓰다듬었다. 여주의 방 불빛에 비친 정한의 눈에 고인 눈물에 여주는 고개를 숙이고, 곧 말없이 정한을 끌어안아 등을 쓸어내렸다.
여주) ...내일 떡볶이나 먹을까?
정한) .........
여주) 이놈의 어른이들은 어떻게 달래야하는지..
정한) .........
여주) 다 괜찮아. 괜찮-,
정한) 사라지지마.
여주) .........
정한) 너까지 사라지면 나 이제 진짜 못살아.
여주) .........
정한) 민현이 살려놔달라고 부탁 안할게. 지훈이도, 애들도 안힘들게 도와달라는 부탁 안할게.
여주) .........
정한) 그니까 여주야, 제발 사라지지말자.
..그냥 내 곁에만 있어줘.
아니, 곁에 없어도 되니까 눈에 보이기만 해.
더 큰거 아무것도 안바랄테니까 사라지지마.
여주) .........
정한의 흐느낌에 여주는 공허한 눈빛을 하다가 눈을 감았고, 그와 동시에 눈물이 흘렀다. 여주가 정한의 등을 토닥거리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토마토도 던지면 다시 열려.
..나도 그럴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다 괜찮아질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