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만의 시간
2부
16.
“존나 찰싹 달라붙어있네. 찹쌀떡이세요?”
내 핸드폰을 가지고 놀던 박찬열이 썩은 표정을 짓고서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게 던진다. 뭘 봤기에 저런 반응인가 싶어 액정을 들여다보니 떡하니 펼쳐진 건 나와 종인이가 볼을 찰싹 맞대고 찍은 사진. 어제 부끄러워하는 김종인을 어르고 달래서 얻어낸 사진이다. 아주 귀한 사진이지. 암, 그렇고말고. 사진을 보니까 반사적으로 웃음부터 피었다. 중학생 김종인을 삭제하고 얻어낸 사진이라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뭐 이정도면 만족스럽다. 귀에 걸려있는 입 꼬리를 어떻게든 내리려고 무표정을 지어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다. 아, 계속 웃었더니 광대가 다 아플 지경이다. 손가락을 얼굴로 가져갔다. 입 꼬리를 일부러 아래로 잡아 내리며 박찬열을 쳐다봤다. 여전히 표정이 썩어있다. 아, 왜. 뭘.
“좋냐? 좋아 죽네, 아주 그냥.”
“아니, 별로 안 좋은데?”
여기서 또 솔직하게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간 아주 그냥 욕을 한 바가지로 들어먹을 것 같아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랬더니, 찬열이가 쥐고 있던 책을 내 얼굴로 던지려고 한다.
“웃기고 있네. 야, 누굴 속이려 들어.”
“그거 나한테 던지려고?”
“맘 같아선 돌을 던지고 싶은데, 내 손에 있는 게 책이라서 아쉬울 따름이다.”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들었던 책을 다시 책상으로 내려놓는다. 그런 녀석에게 살며시 세 번째 손가락을 들어 올려줬다. 엿이나 쳐 드셈.
“미친놈. 빨리 헤어져라.”
박찬열이 내 엿에 대한 보답으로 악담을 던진다. 대답할 가치가 없는 것 같아서 못들은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근데 또 가만 생각해보니 기분이 좀 나쁜 거라. 이제 막 시작한 파릇파릇한 우리에게 헤어지라니. 이건 갓 태어난 어린아이한테 빨리 죽으라고 한 거나 다름이 없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막말이잖아! 비약이 너무 지나친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그만큼 기분이 나쁘니까 이런 미친 생각까지 드는 거 아니겠어?
인상을 구기며 다시 박찬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존나 막말이 심하시네요. 개새끼야.”
이번엔 박찬열이 나에게 엿을 준다. 내가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자 오히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세 번째 손가락을 들어올리기에 그 손을 확 꺾어버릴까 하다가 참았다. 그래도, 난 교양있는 남자니까.
“널 봐서라도 존나 오래 가고 만다.”
“결혼 할 기센데?”
“응. 결혼 할 거야. 김종인 나한테 시집오라고 해야겠다.”
난 되게 진지하게 말한 건데, 박찬열이 갑자기 풉 웃음을 터뜨린다. 아니, 왜?
“꼴을 봐선 네가 그쪽에 시집가야 될 것 같은데?”
아무튼, 박찬열 존나 개새끼.
이젠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못들은 척 무시하고 말았다. 박찬열 때문에 가라앉은 기분, 김종인 보면 다시 살아나겠지? 그런 생각에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홀드버튼을 꾹 누르면 잠금 해제버튼과 함께 어제의 그 사진이 화면에 뜬다. 사진 찍는 게 낯선 듯 조금은 어색한 표정이 너무 귀엽다. 어제도 찍어놓고 귀여워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봐도 봐도 귀엽고, 안 질린다. 역시 찍어 놓길 잘했다. 모든 것은 처음이 어렵다고 그랬어. 누가 그랬는 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뽀뽀도 그렇고 키…스도 그랬으니까 아마 사진 찍는 것도 앞으론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생각만 해도 좋다.
“아, 뻐근해 죽겠다.”
수업 시간 내내 맨 앞자리에서 용기 있게 엎어져 자던 변백현이 어깨를 주무르며 다가왔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시체처럼 걸어오는데 흠칫 놀랐다. 싸운 건 아니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다가온 건 꽤 오랜만이라서 놀란 것도 있고, 또 표정이 워낙 못 볼꼴이라서. 눈을 크게 뜨고 어느새 코앞까지 걸어온 백현이를 올려다봤다. 변백현이 무심한 표정으로 내 머리를 꾹 누르며 하품을 쩍 한다.
“잠 좀. 제발, 어?”
“아, 피곤해 죽겠다.”
자연스럽게 녹아든 나와 변백현의 모습에 찬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를 번갈아 본다. 그러더니, 알겠다는 표정으로 한번 씩 웃고 만다. 오랜만에 셋이서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그리웠다고. 아직도 내 머리위에 올려 진 변백현의 손을 쳐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밤에 대체 뭐한다고 늦게 자냐고. 아, 낯간지럽게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보나마나 게임했겠지, 뭐.”
“빙고!”
“내 주위엔 진짜 멀쩡한 애가 없는 것 같아. 온통 또라이들 밖에 없어.”
“그러는 니가 제일 또라이야, 병신아.”
“변백현, 너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되게 기분 나쁜 거 알아?”
“듣던 중 반가운 소린데? 야, 경수야. 들었냐? 박찬열이 기분 나쁘대. 완전 신나지 않아?”
두 머저리들이 또 내 앞에서 티격태격이다. 그래서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말았다. 변백현이 반응이 시원치 않다고 찡찡거리며 내 어깨를 잡아 흔든다. 귀찮아서 그 손을 쳐냈다. 그러니까 또 쳐낸다고 뭐라고 해. 아무튼, 얜 진짜 말 많다니까. 고개를 저으며 여전히 쥐고 있는 핸드폰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변백현이 틈새를 놓치지 않고 내 손에서 그것을 잡아채 갔다.
“아, 이건 또 뭐야. 유난떨고 있네, 진짜. 너네 무슨 한 몸이야? 몸이 한 개고 머리는 두갠가?”
변백현이 못 볼 걸 봤다는 듯 몸서리를 치며 다시 내게 핸드폰을 돌려준다. 근데 얘도 표정이 썩어있어. 아니, 대체 왜? 내가 보라고 보라고 사정해서 본 것도 아니잖아. 지들이 맘대로 봐놓고 표정이 왜 그러냐고요. 난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변백현이나 박찬열 표정을 보면 꼭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 같단 말이야. 책상위에 올려 진 핸드폰을 바지 속으로 숨겼다. 됐어, 나 혼자 꽁꽁 숨겨놓고 볼 거거든. 귀여운 김종인 아무한테도 안 보여준다, 이제.
입술을 삐죽였다.
“야, 나중에 오세훈도 짜증내면서 하소연하러 오겠다.”
변백현이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찬열이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박찬열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아, 이렇게 나를 공격할 줄은 몰랐는데. 이런 식으로 놀림 받은 건 또 처음이라 어떻게 빠져나가야 될지도 모르겠고. 난 그저 종인이가 보고 싶을 뿐이고. 괜히 할 말이 없어서 머리만 긁적이며 녀석들을 쳐다봤다.
“불쌍한 오세훈. 하루 종일 시달릴 거다, 아마. 야, 박찬열 넌 모르지? 김종인이 생각보다 끈질기거든? 도경수는 놀리는 맛이라도 있지. 걘 꿈쩍도 안하고 지 얘기만 하고 있을 걸?”
“그 정도냐. 난 얘도 못 봐주겠는데. 하루 종일 싱글벙글. 입을 찢어버리고 싶다, 진심으로.”
“김종인이 전에 여친….”
연애는 우리 둘이 하는데 왜 니들이 지랄이세요. 이런 표정으로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변백현의 입에서 나오는 김종인 전 여친이라는 단어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당연히 내가 처음이 아닐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김종인이 처음 사귄 게 아닌데, 그 아이라고 뭐가 다를까. 그래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내가 음산한 기운을 폴폴 풍기자 신나게 떠들던 두 놈이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내 눈치를 본다. 박찬열이 백현이 옆구리를 퍽 소리 나게 치면서 그놈의 입방정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분위기만 흐릴 것 같아서 나는 아무것도 못들은 거라고 기억을 조작하려 애썼다. 머리를 한번 털어버렸다.
“아, 미안. 내가 괜한 소리를 꺼내가지고.”
백현이가 찬열에게 맞은 옆구리를 감싸며 내게 사과를 해오기에, 그냥 고개를 한번 저었다.
“난 쿨 하니까 괜찮아.”
쿨 하긴 개뿔. 난 쿨 하지 않아! 쿨 하지 않다고!
짜증나서 머리를 마구 헝클이다가 다시 변백현과 박찬열을 바라보았다. 둘 다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한다. 개새끼들. 내 기분을 망쳐놨어.
“야, 경수야. 진짜 괜찮아?”
“어. 난 괜찮아.”
그렇지만 또 괜찮은 척 이를 악 물고 대답했다. 눈치 빠른 박찬열은 내 기분을 알아채고 입을 다물었지만, 변백현은 역시 눈치 없는 놈다웠다. 괜찮다는 내 말에 진짜 괜찮은 줄 알았나보다. 활짝 웃으며 박수를 친다. 그러면서 눈을 빛내며 내 얼굴에 가까이 다가와서 하는 말이….
“괜찮다니 다행이다. 야, 근데….”
“근데, 뭐.”
“내가 가만히 생각을 해봤거든.”
“무슨 생각.”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꼭 물어보고 싶은 거야.”
“뭔데.”
“내가 진짜 궁금한 게 있어.”
“아, 그러니까 대체 뭐냐고.”
뭔데 이렇게 질질 끌어, 짜증나게. 안 그래도 기분 안 좋은데 사람 놀리나.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안 어울리게 말을 끄는 변백현을 아래위로 훑었다. 기분 나쁘라고 그런 건데 얘가 알아먹었을지 의문이다. 난 못 알아들었다 에 한 표요.
“니들.”
“…….”
“진도 어디까지 나갔냐?”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내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변백현의 머리통 위로 박찬열의 손이 날아들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백현이 아프다고 머리를 감싸며 찬열을 노려본다. 박찬열은 그 시선을 받으며 썩은 표정으로 변백현을 한심하게 쳐다볼 뿐이다.
나는 백현이가 좀 무섭다. 이해해본다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무슨 진도를 물어보고 난리야? 얜 대체 정체가 뭐지? 뭐하는 애야, 진짜?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아서 어안이 벙벙하다.
“에라이, 새끼야. 넌 그게 궁금하냐?”
“당연히 궁금하지. 원래 남의 연애사가 제일 재밌는 거 아니겠어?”
“배신자들이니 뭐니, 욕을 한 바가지로 할 땐 언제고…. 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해 못하겠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나?”
“원래, 인생은 둥글 게 사는 거야. 애가 왜 이렇게 꽉 막혀있지?”
아, 헛소리. 변백의 말을 듣고 있자니 내 머리가 다 아프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변백현을 쳐다보기만 했다. 보아하니 내가 답하지 않은 걸 벌써 잊은 것 같다. 찬열이가 녀석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또 머리를 한 대 쳤다. 그랬더니 아프다고, 자꾸 왜 때리냐고 찡찡거리기만 해.
“병신아, 병신아. 내가 너를 욕을 안 하려고 해도 안할 수가 없게 만든다.”
“아니, 내가 뭘 어쨌냐고요. 그냥 순수하게 궁금했던 것뿐인데.”
“너, 머릿속으로 야동 띄워놓고 그런 건 아니지? 더러운 새끼.”
찬열의 말에 변백현이 대답을 않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 눈을 깜빡인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진 모르겠어. 그런데, 왠지 내 생각으론 영양가 있는 생각은 아닌 것 같고 막 그래. 너도 동감하지, 찬열아? 박찬열을 쳐다보니 한숨만 푹 내쉬며 주문을 외우듯이 단어를 반복하고 있다. 또라이, 진짜 또라이야…. 그 말에 공감이 가는 건 왜일까? 나도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그러건 말건, 한참을 말없이 사색에 잠겨있던 백현이 곧 몸서리를 치며 나를 향해 말했다.
“아.. 시발... 그냥 안 물어볼래. 야, 대답하지마라.”
이번엔 내가 변백현의 머리를 탁 소리 나게 내리쳤다.
원래 대답 안하려고 했어, 병신아.
一
[집중해. 내 생각하지 말고 칠판 보라고.]
뜬금없이 종인이가 문자를 저렇게 보내왔다. 나 진짜 공부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김종인 생각 하나도 안하고 칠판만 보고 있었는데 괜히 문자를 받고 나니까 공부가 하나도 안 된다. 어떻게 이렇게 귀엽지? 이건, 공부하지 말고 자기 생각하라고 보낸 문자 아니겠어? 몰래 고개를 숙여 킥킥 웃었다. 아, 망했어. 이제 공부는 끝났다. 얼른 핸드폰을 잡고 답장을 써내려갔다. 뭐라고 보내지? 뭐라고 보내야 할까.
[니 생각 하나도 안했어. 진짜야.]
고민 끝에 답장을 보냈다. 전송 버튼을 누른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금세 답장이 와있다. 공부 안하나봐, 김종인.
[칠판 보라니까 왜 이렇게 답장이 빨라. 공부 안 해?]
[그러는 너는.]
[난 잘하니까 잠시 쉬어도 돼.]
[헐.. 재수 없다.]
[농담이야.]
[너 방금 좀 재수 없었어.]
[나도 알아. 재수 없어도 한번만 봐주라.]
[내가 착하니까 그냥 넘어가준다. 앞으론 잘해. 알았어?]
[고마워. 지금 무슨 시간이야?]
[국사. 나 완전 열공하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망했어. 그러니까 니가 나 책임져.]
[어, 진짜? 그럼 다시 하던 공부 다시 해.]
[집중력 날아갔어. 끝났다고 벌써.]
[미안ㅠㅠ]
[ㅋㅋㅋㅋ미안하면 쉬는 시간에 우리 반으로 와.]
[알겠어.]
[넌 무슨 시간인데, 놀아?]
[체육.]
[체육인데 문자를 해?]
[괜찮아. 오세훈이 옆에서 욕한다.]
[걘 무시해 그냥. 아참, 아까 변백이랑 박찬열이 나 놀렸어ㅠㅠ]
수업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냥, 종인이랑 문자를 주고받은 것 밖에 기억이 없다. 자는 것처럼 엎드려서 책상 밑으로 핸드폰을 내려놓고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이렇게 길게 문자 한 건 처음인 것 같다. 바탕화면에 떠있는 우리 사진도, 최근 통화 목록을 가득 채우는 네 이름도, 마냥 좋기만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종인이에 대한 마음이 커져가는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종인이도 그런 것 같지만. 어떻게 보면 그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은, 조금 무섭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겁이 난다. 풍선이 점점 커지다가 뻥하고 터질 것 만 같아서…. 내가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쉬는 시간에 찾아가서 때려줄까?]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응, 네가 변백이랑 박찬열 때리면 내가 오세훈 때려줄게.]
하지만, 분명한건 지금 이 순간이 나는 너무 행복하다는 것이다.
***
이제 그만 질질 끌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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