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연애 중인 엑소 디오와 탑시드 홈마 너징 썰 12
BGM : 샤이니 - 너와 나의 거리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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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수정이를 한참이나 안고 있었다. 내 눈물까지 대신해서 쏟아준 수정이는 울다가 지쳐서 잠들었다.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마음고생이 심했을 수정이였다. 워낙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수정이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뒤에 방 밖으로 나왔다.
그냥, 나한텐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섭고 잔인한 상상이 떠올라서 모든 걸 지우고 싶기도 했지만, 앞뒤가 맞지 않게 내게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생각이었다.
하지만, 언젠간 해야 할 고민이니까…. 아, 모든 생각이 자꾸만 실뭉치처럼 다시 풀 수 없게 꼬여간다.
딜레마에 빠져 한참이고 고민하다 결국 기회를 놓쳐버리는 죄수 같았다. 공범을 신고할 지, 침묵을 지킬 지 고민하는.
경수를 선택하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두 가지였다. 두 가지 중 어떤 한 가지도 정확히 경수를 완벽히 위한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두 가지 선택의 갈래에서 어느 쪽으로 향할 지 가늠하지 못하고 헤매는 어린 아이 같았다. 마치 나는….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가을비. 이제 저 비가 지나고 나면 날씨가 쌀쌀해지고 이내 초겨울로 접어들겠지.
내 마음도 저렇게 가을비가 내리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겨울처럼 쓸쓸하고 뚝 떨어진 계절로 접어드는 길.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슬펐다. 무릎을 가슴 가까이로 끌어안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트레이닝복 바지 위에 올려진 얼굴에서 나오는 소리가 그를 둘러싼 긴 갈색 머리카락을 뚫고 묻으려는 듯 새어나갔다.
회색 트레이닝복 바지가 머리칼에 가려진 부분부터 점점 주위로 번져가며 색이 짙어져갔다.
소리를 삼키느라 등이 크게 들썩였다. 한 번 숨을 내쉴 때마다 짠기가 훅 들어왔다.
며칠 전 경수가 라디오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음에 새겨두었던 그 말.
'요즘, 밖에 나가면. 많이 서늘해졌죠.
옷섶을 여미고 한 발짝을 내딛을 때마다, 얼굴에서 부서지는 바람이 꽤 차가워요.
초가을, 세찬 바람이 불 때마다 하나둘씩 떨어지는 낙엽들.
가을. 어쩌면 우리에게 자신을 재정비하고 준비하기 위한 단계가 아닐까요?
힘든 시련을 헤쳐나가기 위해, 자기 반성의 시간과 성숙해지는 시간.
생명을 다하고 떨어지는 낙엽처럼, 자라고 영글어 수확되는 벼들처럼.
어쩌면 가을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저 높이 있는 건물 꼭대기로 올라가는 마지막 층계의 계단이 아닐까요?
저 높이 푸른 하늘에서 쏟아지는 주황빛 햇살을 맞으며, 한 층 더 어른스러워지기 위한 시간이 아닐까요?
여름의 열병이 지나가고, 열병이 어지르고 간 여러분의 마음 속의 바쁜 일상을 다시 정리해주는 시간이 아닐까요?
감수성 풍부해지는 10월, 그리고 가을.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세요?'
그 때의 나는 나의 열병이 무엇일지 궁금해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서야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미 그 열병은 내게 찾아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나의 열병은 도경수였다.
날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는 열병. 나의 일상을 어지르는 도경수.
하지만, 난 나를 괴롭히는 열병을 미워할 수 없다. 열병이 지나고 나면 더 성숙해지고 더 강해질 테니까.
지금, 나는 성숙해지는 중일까? 일종의 성장통일까?
아니다. 그러기엔, 너무 대가가 큰 것 같다. 내 전부를 포기하느냐, 아니면 내 전부가 그의 전부인 날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느냐.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은 항상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한다. 아직 어린 아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그 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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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그러고 나니 힘이 쭉 빠졌다. 어느덧 밤이었다. 오늘 한 거는 운 것 밖에 없는 것 같은데.
말도 한 마디도 안하고 하루 종일 울기만 해서 목이 칼칼했다. 이제 울기만 하는 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물을 따라 마시고 문득 작업실 앞에 멈춰섰다. 이끌리듯이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홈페이지에는 수많은 방명록이 남겨져 있었다. 오늘 경수 스케줄이 있었는데 못갔네. 한 마디 말 없이 모두와의 약속을 어긴 게 맘에 걸렸다.
나는 'Diary' 카테고리에 죄송하다 글을 올리려다 문득 내가 그동안 올렸던 글을 보았다.
내용들은 모두 다 일관성이 있었다. 하나같이, 경수야. 오늘 되게 멋졌어. 항상 우리의 빛이 되어줘. 이런 내용.
다시 생각해도 참 와닿는 말이다. 빛이 되어줘. 그래. 경수는 나의 빛이니까.
나의 빛은 언제나 날 비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가 나의 힘으로 빛을 꺼트릴 수는 없다.
늘 어두운 나를 밝게 비춰주고 환한 곳으로 이끌어준 내 빛.
일단,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생활할 필요성이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나의 끝없는 망상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가서, 경수의 팬페이지 홈마스터로 사는 일상을 소화해야 한다.
나는 짧은 생각을 마치고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그리고 옆에 차분히 놓여진 카메라의 렌즈를 꼼꼼히 닦았다.
#31.
몇 주가 지났다. 겉모습은 괜찮아진 듯 했다. 물론 속마음은 있는 대로 상처가 곪아 문드러져가고 있었다.
엑소의 쇼케이스는 예정보다 미뤄졌다. 컴백 예정일이 늦어졌다며 내년 2월을 기약했다.
난 그 이후로 한 번도 빠짐없이 경수를 졸졸 쫓아다녔다. 요즘엔 예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늘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내가 요즘엔 엑소의 출퇴근길에 그 애들의 바로 앞까지도 가서 힘겹게 사진을 찍어댔다.
왠지, 마음이 힘드니까 몸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었던 마음에.
그토록 사람과의 신체적 접촉을 피했던 내가 반쯤 혼이 나간 열정적인 팬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는다. 찰칵, 찰칵..
몇 주가 지났지만 아직 나는 제대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반면에, 수정이는 이제 소장본 배송도 끝냈고, 여유롭게 글을 쓰고 있었다.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가 찬열이와 매일 밤 카톡을 하면서.
아니, 사실 여유가 있지는 않다. 그냥, 힘들면 일에 더 집착하게 된다고 하던가. 그런 종류의 느낌이 들었다.
며칠 밤을 계속해서 컴퓨터 앞에 앉아 타이핑하다가, 찬열이에게 카톡이 오면 그제서야 몸을 일으켜 씻고 자러 가는. 로봇같은 일상.
나는 수정이에겐 위험하니까 집에 있으라고 했다. 일상으로는 돌아갔지만 안그래도 많이 여려진 수정이라, 더한 말로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나가면 듣고 있는 끔찍한 말들에 이미 칼로 난도질된 듯한 내 마음도 어떻게 여기서 더 망가질까 싶을 정도로 찢어지기 때문에.
가끔씩, 밤늦게까지 깨어서 사진을 정리하다 보면 바로 옆의 수정이의 방에서 울음 소리가 새어나온다.
아닌 척하면서도, 힘든 거다. 드래그를 멈추고 잠시 그 소리를 듣다 보면, 저절로 힘이 쭉 빠져나간다.
결코 나는 수정이까지 다치게 할 수 없었다.
너희도 이런 우리를 알까?
나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마음을 정한 수정이도 저렇게 힘든데, 난 아직 그 마음조차 정해지지 않아서 더 이리저리 흔들리고 꺾여다녔다.
경수가 연습생으로 들어갔을 때부터 연락은 아주 급할 때만 하기로 약속한 바라서 연락도 잘 하지 않았고.
수정이는 그나마 나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적어도, 무리해서라도 매일 연락을 하고 사랑을 느꼈으니까.
요즘에 급하게 많아진 사생들과 카메라들 탓에 제대로 주변을 살피지도 못한 채 자기 앞만 보고 얼른얼른 사라지는 경수.
웃지도 않고, 무대에서도 감정 없이 임하는 태도 탓에, 여러 팬들이 아프냐며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나도 태도논란이 뜰까 두려운 마음과, 정말 어디 아픈가, 싶은 마음. 그리고 혹시나 사생들이 괴롭혀서 힘든걸까. 싶은 마음이 섞여 두려웠다.
제 3자의 입장으로 우리가 그렇게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조각을 느끼게 된다.
나는 언제까지나 너를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을 수만은 없는데, 넌 이제 많은 사람들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팬인 척 연기하며 애써 너와의 관계를 숨기고 늘 여기저기 치여가며 너만을 바라보던 나. 하지만 너는 이제 나 뿐만이 아니라 모두의 빛이 되었다.
문득 노래가사가 떠오른다.
손을 더 뻗어도, 온 힘을 다해 뻗어도, 넌 닿지 않아.
나만 힘들어하는 걸까. 넌 이제 꿈을 이루고 행복한데, 나만 방황하고 있는걸까.
요즘들어 어두워 보이는 경수의 얼굴이 많이 신경쓰였다.
너도 나처럼 힘든거지? 사생들한테 괴롭힘 당하고 많이 힘든거지?
못되게도, 나는 나만 힘든게 아니란 사실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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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은 사람을 망가뜨린다. 완전히 바꿔버린다. 악의 구렁텅이로 쳐넣어 영원히 그 곳에서 사악하게 웃게 만든다.
그리고 나도 그렇다.
고개를 털어 검은 조각들을 억누르고 제정신을 찾고 나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상실감이 든다.
나도 이게 나의 괜한 욕심이란 걸 안다. 경수는 나에게 훨씬 아까운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힘들단 이유로 갑작스런 변심을 하고, 그 책임을 모두 경수에게 묻는 나약하고 나쁜 사람이다.
그걸 알면서도, 자꾸 널 탓하게 되는 내가 미웠다.
그래서 널 더 가까이 하고 싶었고, 더 많이 다가갔다.
경수가 내가 미치지 않게 도와줬으면 좋겠다.
내 진짜 속마음은 이렇다.
상대를 너무 위하고 배려하는 모습은 내가 없어졌을 때 상대를 미치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경수에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저주스럽고 끔찍했다. 피해의식에 젖어 미쳐버린 것 같은 내가 두려웠다.
정말, 내가 다른 여자들이랑 같은 존재가 될까봐 무서웠다.
쓰잘데기 없는 질투와, 티내고 싶은 욕심 탓에 우리를 망쳐버리는.
너무 무서웠다, 나는. 내가 변해버릴까봐.
정말, 미쳐버릴까봐……, 경수에게 미안하다. 한없이.
#32.
여느 때처럼 엑소가 나오길 기다렸다. 차분히 카메라를 손에 들고.
엑소 멤버들 열두명이 나오자 모두들 소리를 지르며 멤버들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그 모습이란 사탕에 꼬인 개미떼들 같았다.
경수는 무표정으로 걸어나왔다. 뒤쪽에서 천천히.
카메라를 들어 내 얼굴을 가리고 경수의 얼굴을 찍었다. 속으로 경수야, 웃어봐…. 하고 중얼거리며.
경수는 웃지 않았다.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걸까.
조금 속상했지만, 곧이어 카메라의 크기가 내 얼굴을 충분히 가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생각을 애써 떨쳤다.
경수 뒤에는 조금 떨어져서 매니저와 함께 걸어오는 세훈이가 있었다.
그 애는 검은색 비니를 쓰고 매니저 형의 말이 잘 안들리는 지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엑소엠 멤버들이 먼저 차를 타고 떠났다. 다른 스케줄이 있는 탓에 먼저 떠나야 한다고.
엑소케이는 지금 차량이 제 때 빠져나오지 못해 조금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짝다리를 짚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경수를 찍었다. 찰칵, 찰칵….
카메라를 살짝 내리자, 그 순간 경수와 눈이 마주쳤다. 경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몇 주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웃음을 보였다.
특유의 미소. 경수의 예쁜 입술과, 한 쪽 입꼬리를 쓱 끌어올려 웃었다.
옆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경수가 웃었다며, 아이컨택을 해주었다며 시끄럽게 떠들면서 사진을 찍어댔다.
몇 주 동안 힘들어하며 한 번도 웃지 않았던 경수가 날 보자마자 웃었다.
그래, 나는 경수에 의해 환하게 틔워지는 존재이다. 사람은 빛이 없이는 살 수 없듯, 나는 경수 없이 살 수 없다.
확신이 들었다. 딜레마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하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다리의 입구를 지날 수 있다.
안전하게 다리를 빠져나가, 행복하게 둘이 살 수 있다.
헤아지거나, 삶을 포기할 필요 없이, 우리가 하나가 되어 다리를 빠져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허탈했다. 마치 두 시간을 잡고 끙끙댄 미로의 문제가, 미로 밖으로 주위를 돌아가서 도착지점에 도착하는 게 정답이란 걸 안 기분이었다.
나는 경수가 내게 웃어주는 순간, 몇 주 동안이나 고민하던 것의 답이 떠올랐다. 모든 게 환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엑소케이의 차량이 도착했다. 나는 카메라를 접고 백팩을 앞으로 돌려 카메라를 소중히 집어넣었다.
그런데,
"아까 도경수 여친 있었냐?"
"그런 것 같대. 방금 카톡 옴."
"몇 주 동안 안웃더니 갑자기 웃네."
"아, 존나 빡친다 갑자기. 우리가 그동안 쇼하면서 웃으라고 했는데도 꿈쩍도 안하더니 갑자기 여친이 있으니까 웃네."
"아 씹새끼. 죽여버리고 싶다 진짜. 우리 도경수가 얼굴 어디가 찢어져봐야 정신을 차릴까?"
"글쎄. 톡 치면 도르르 굴러나올 것 같은 눈알을 뽑아버려야 되나?"
까르르 웃는 그 사람들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대화는 끔찍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
온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저렇게 말한 이상 농담으로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안그래도 요즘에 사생들이 경수에게 괜한 시비를 걸고 점점 그 수위가 강해진 단 얘기를 들었다.
애초에 저런 말을 농담 따위로 넘길만한 레벨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생들의 공간에는.
그렇다면,
"잠깐만요. 길 좀 비켜주세요."
"씨발. 비켜요. 나 지금 도경수 얼굴 예쁘게 녹여주러 감."
아마, 저 사람들은 돈으로 막아서 처벌도 받지 않을 거고,
"씨발. 안비켜?"
그럼 내가 지키려던 모든 건 수포로 돌아간다.
"니 얼굴 먼저 녹여줘야 정신 차릴래?"
그렇다면.
거기까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머리보다 몸이 더 먼저 나갔다.
그 사람들 앞을 막아서고 뒤를 돌아보자, 다행히 경수가 차를 타려 줄을 서고 있었다.
엑소 멤버들은 아직 이 사태를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뒤에 있는 팬들은 모두 카메라를 내려놓고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내가 시간을 끌면 된다. 나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이럴 땐 정말 표정없는 딱딱한 내 얼굴을 갖고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했다.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이 순간엔 너무나 행운이었다.
"저기요. 저 아시죠. 저 도경수 탑시드 홈마스터인데. 제 앞에서 경수 얼굴 녹이니 뭐니 하지 말아주실래요.
솔직히 입장 바꿔서 제일 빡치는 건 저 아닙니까? 맨날 대포들고 쫓아다녔는데 여친 왔다고 바로 웃는 거, 제가 좋아서 참고 있습니까."
"뭐래는거야, 씨발년아. 좆같게 굴지말고 꺼져."
할 줄 아는 건 욕과 폭력, 그리고 자기 과시밖에 없는 아직 아기들이었다.
별 것 아니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에도 쉽게 반응하는 모습이 그렇다. 이 정도면 상대할 만 하다.
물론 저 아이들이 경수에게 말하는 것처럼 유창한 피해를 끼치진 않겠지만, 그래도 놀라게 해주고 싶지도 않은 마음에.
온실 속 화초로 경수를 예쁘고 곧게 자라게 하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내게로 타깃을 돌리도록 더 도발했다.
"좆같으면 내 얼굴에 한 번 부어보든지. 내 얼굴 먼저 녹여봐. 책임질 수 있어?"
"이 년이 지금 뭐,"
"못 부어?"
일부러 평생 하지 못할 욕을 입에 담아가며 강한 척을 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리고 일부러 부추겼다.
내가 없는 곳에서 경수에게 해꼬지를 할까 두려워서, 그래서 경수에게 하지 말고 내게 하라고 부추겼다.
"아, 존나 귀찮게 하네. 너 칼빵 맞고 싶어?"
거기서 가장 키가 큰 사람이 내게 커터칼을 얼굴에 꽂을 듯 말 듯 들이밀었다.
어차피 커터칼에 좀 찔린다고 죽지는 않는다. 그저 겁을 주려는 용도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굳이 물러나거나 피하지 않았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들에겐 결코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일 만큼 찌를 만한 대담함이 없어 보였다.
계속해서 도발하던 그 여자는 경수가 차에 올라타려는 기미가 보이자 흥분해서 나를 밀치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그 흔들리는 손을 피할 새도 없었다. 급작스런 상황이었다.
나와 심지언 그 사람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겁만 주려던 칼이 정말 날 찌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고 경험하지도 못했던 통증이 내 눈에 찾아왔다. 무언가 뿌옇게 내 왼쪽 눈을 덮었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몸이 반응하여 저절로 눈을 꼭 감게 되었다. 눈을 꼭 눌러 감아도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떡해, 눈에서 피 나나봐... 피 흐르는 것 봐 징그러워...
내 눈에서 피가 나나보다. 아,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인 것 같다. 앞에서 내게 칼을 들이민 사람은 당황한 목소리로 욕짓거리를 뱉고 있었다.
귀로만 들려오는 상황들. 그 상황을 놓치지 않고 캐치해내려 최대한 집중력을 끌어모았다. 침착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경수는 안전하다. 내 눈이 병신이 되었는데도 경수 걱정만 하는 내가 어쩌면 한심해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팬들이 갑자기 모두 카메라를 내려놓고 얼음이 되어있으니 무슨 소동이라도 벌어진 줄 알고 찾아온 모양이다.
팬들이 다들 자기 할 말을 늘어놓았다. 간간히 들리는 칼, 피, 눈, 경수, 뭐 그런 단어들.
남자가 내 팔을 잡고, 일단 119를 부르겠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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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보니까 새하얀 병실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수정이가 있었다.
하루를 꼬박 잤는지 새하얀 낮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한 쪽 눈이 칭칭 감겨 있었다.
상황파악은 눈을 뜬 지 5초만에 끝낼 수 있었다. 내 왼쪽 눈이 영영 보이지 않을 것이며, 여긴 병원이란 거겠지.
그리고 수정이는 내 짐을 가지고 와서 하루 종일 날 간호했을 거고. 참 뻔한 레파토리였다.
한숨을 쉬고 옆을 돌아봤다. 수정이가 갖다 놓은 것 같은 조금 뒤적거리다가 검은색 아이폰이 눈에 띄어서 집어 올렸다.
잠금을 풀자마자 맨 먼저 불안한 마음으로 트위터에 들어갔다.
SM 직원들께서 일이 다른 곳으로 퍼지는 걸 막아 주셔서 다행히 DM으로만 몇몇 친한 팬페이지들의 괜찮냐는 말이 와있었다.
아무 일도 없는다는 듯한 트위터에 일단 안심을 했다. 경수의 귀에 내가 다쳤다는 이야기가 절대로 들어가선 안된다.
지나가다 창문으로 내가 깬 걸 발견한 간호사가 담당 의사를 불러왔다.
담당의사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고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셨다. 솔직히 조금 듣기 힘들었다.
나는 의사에게서 내 상태를 모두 전해들었다.
끝까지 고개를 끄덕거리고 의사가 나가자 마자 병원복을 입은 팔을 얼굴 위로 올렸다.
그냥, 모든 내 행동에 절대로 후회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왜 꼭 눈이어야만 했을까. 다른 곳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왜 꼭 눈이어야만 했을까.
경수를 탓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 안의 검은 조각들은 내게 말한다.
'도경수는, 나의 첫 번째 꿈 뿐만 아니라, 두 번째 꿈조차 앗아갔다.'
고통스러웠다. 괴로웠다. 끔찍했고, 가혹했으며, 참혹하고 잔인했다. 현실은 내게, 그렇다.
내 선택이 너무 무리한 선택이었나, 싶다.
오히려 나 뿐만 아니라 경수까지 망친 게 아닌가 싶어 무서웠다.
울고 싶었는데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슬펐다. 슬픔을 표현해낼 길이 없어서 답답했다. 팔을 얼굴에서 내리고 가만히 반대편 벽을 응시했다.
그 때, 수정이가 반딱 깨어났다. 그러더니 눈을 뜨고 있는 나를 보고 끌어안았다. 가볍게 흔들리는 등. 날 보자마자 울어버리는 수정이에게 미안했다.
수정이는 나보다 약했다.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아도 잘 버텼지만, 수정이는 유난히 버티는 걸 힘들어했다.
그런 수정이에게 내가 유일한 버팀목이었는데, 내가 이렇게 망가졌다. 수정이는 분명 자기가 다친 것보다 배 그 이상으로 아파할 것이다.
난 괜찮아, 넌 다치지 마. 하며 나가서 모든 걸 잃고 온 날 보는 수정이의 마음이 어떨까. 혹시나 죄책감이라도 느낄까 미안했다.
수정이는 이내 나를 떼어내 눈물을 닦아내고 애써 웃었다. 그 모습이 전혀 웃는 것 같지 않았다.
"수정아."
"응."
"나."
"……."
"어떡...하지?"
"그러,게. 어떡하냐. 오징어."
수정이는 울면서도 웃었다. 정말 나 어떡해..? 간절한 내 마음이 느껴지는 지 수정이는 약간 밝고 슬프게 말을 이었다.
"피아노도 때려치고, 이제 눈도 병신되서 어쩌냐. 넌 이제 도경수 없으면 어떻게 살아? 누가 데려가?"
"그러게.. 진짜 어떡하지."
수정이의 말이 전혀 기분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엔 간절했다가, 나중에는 편해졌다.
몸에 힘을 풀고 좀 늘어졌다. 그냥 좀 쉬고 싶었다. 모든 걸 멈추고, 인생을 일시정지 시키고, 조금 쉬고 싶었다.
수정이는 뭐 마실래? 하며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왔다. 한 쪽 눈으로만 보는 거에 적응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세히 주스 표면에 쓰인 글씨를 읽었다.
사과, 오렌지, 포도….
간단한 단어들인데도 읽기가 힘들었다. 조금 익숙해지면 괜찮겠지. 쓴 웃음을 지으며 난 포도, 하고 말했다.
수정이는 그럼 나도 포도! 하며 종이컵에 포도주스를 따랐다.
꼴꼴대며 나오는 주스의 소리처럼 속의 모든 걸 다 게워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힘들고, 지쳤다.
-
"본인 상태는 이미 예상하셨을 거예요.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없었습니다. 출혈은 눈 안쪽의 부분이 찢어져서 일어났던 현상이고,
음. 그리고 눈은. 각막 부분이 완전히 찢어졌어요. 이식을 받을 수도 없을 만큼 눈이 많이 망가져서, 아무래도…."
"제 직업은 포기해야 하나요?"
"죄송합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을만큼 망가져 있어서 저희로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그렇다면 보이지는 않더라도 겉모습만이라도 멀쩡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환자분들이 선택하시지 않는 편이에요. 두 쪽 눈을 뜨고 다니는데 한 쪽 눈이 안보일 땐 더더욱 초점이 흐려져 잘 보기 힘들거든요."
"그래도, 꼭. 꼭 부탁드려요."
"……."
* * * * * * * *
베브입니다.
급전개라 생각하시는 분들 있으실까봐 말씀드려요.
본 편은 완벽한 징어시점입니다. 징어는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고 혼란이 온 시기에요.
당연히 중간중간의 사소한 사건들은 전혀 기억에 남지 않을 겁니다. 거기다가, 제대로 된 일상을 하고 있지도 않을 거고요.
자고, 일어나서 엑소 보고, 사진 정리하고, 자고, 중간중간 먹고. 이런 일상이겠죠.
그래서 이렇게 급하게 몇 주가 지나가고, 갑작스런 사건들이 일어나고 그런겁니다.
그리고 '검은 조각'이란 표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악의 마음의 근원입니다.
당연히 누구나 갖게 되는 생각이에요. 왜 나만 이러고 있는 것인지, 나만 피해보고 있는 것 같단 생각.
하지만 징어는 그 마음을 억지로 억누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미쳤다'고 표현하고 그 모든 것들을 끔찍하게 생각합니다.
징어는 마지막에 경수의 웃음을 보기 전에, 자기가 올렸던 다이어리 글들을 보고 1차적으로 마음을 기울여놓아요. 본인은 못느끼지만.
여기서 징어의 성격이 드러나죠?
그리고 글 속에서 나오는 사생은 정말 징어의 판단대로, '쎈 척하는 돈 많은 꼬마' 입니다. 실제로 찌를 패기도 없어요.
우연한 '사고'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고 때문에 징어는 자기의 두 번째 꿈을 잃었죠.
사실 저도 눈에 대해 잘 몰라서, 저게 가능한지 몰라요. 그저 설정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시력은 잃었지만 겉모습은 멀쩡한 왼쪽 눈이요.
그리고 징어가 자꾸 부정적 생각을 하는 모습. 예를 들어, 경수의 탓을 하는 모습은 당연한 겁니다.
절대로 정말 징어가 미쳤거나 나빠졌거나 한 게 아니에요. 저 상황에 처한 다른 일반 커플이었다면 이미 백 번쯤 헤어졌을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기를 혐오하고, 또 최대한 자기를 컨트롤하는 모습이 보인다는 것으로 징어의 성격이 표현되었으면 해요.
그리고 수정이. 수정이는 징어의 생각보다 약한 캐릭터는 아닙니다. 아시죠?
그래서 징어가 다쳤을 때 맘도 아팠고, 징어가 생각한 것처럼 본인이 다친 것보다 더 아파했지만 무너져내릴만큼 약하진 않았어요.
그리고 위에서 말했듯, 계속 자신과 싸우던 징어가 자기를 바쳐서 경수를 보호하게 된 계기는 글에도 나왔듯, 경수가 웃어준 것에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그 순간 징어는 환한 마음을 느꼈다고 헀죠. 그 말은 검은 조각을 완전히 빛으로 묻어버렸단 겁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징어는 경수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인 피아노를 포기했어요. 그리고 경수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경수를 위해서 자기를 바쳐, 자기의 두번째 꿈인 사진까지 잃었어요.
같은 상황에서 여러분의 선택은 어땠을까요?
만약 완벽하게 경수를 탓하지 않고 자책할 것이다. 하시는 분은 당장 부처가 되셔서 세상을 자비롭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징어의 성격을 유감없이 나타냈다고 생각해요.
늘 부족한 글 읽어주시고 정성 담긴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춤법 지적 / 문법 오류 지적 / 오타 지적은 감사히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