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ST : R
"순영아."
"응."
"순영이는, 나중에 커서… 아버지처럼 멋진 요원이 되는거다."
"응."
"아버지가, 그리고 네가 앞으로 빛을 발할 곳은 어디라고?"
"코로나."
"..."
"보리얼리스."
3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한 달에 한번, 코로나 보리얼리스에서 정예요원으로 일하셨던 아버지는 쉬는 날이면 항상 제일 먼저 집에 들어와 나를 반기셨다. 한 달동안 CB 내에서 있었던 일들을 나에게 알려주시며, 내가 성인이 되면 꼭 아버지와 함께 같은 곳에서 일하자고 아버지는 나와 약속했다. 아버지와 같이 일하고 싶었다. 힘들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도망치지 못했던 것은, 일을 하던 아버지의 눈은 언제나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빛나는 눈을 나도 지니고 싶었다. 무언가를 하면서 저렇게 빛나는 눈을 본 적이 있었었나? 아버지를 따라, 멋진 스나이퍼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는 내가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분명, 아버지를 이어 CB의 정예요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순영아, 아마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거야."
"..왜?"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아직 번지지 않아서 몰랐겠지만."
"응."
"2세계가, 우리를 공습했어."
"!"
"꼭, 살아서 돌아올게."
"아버지."
"그 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야 한다. 알았지?"
"...아버지."
근데 아버지는, 왜 돌아오지 않았어?
카타스트로피 대전쟁이 끝난 후, 다 부서진 집엔 한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발신자는 코로나 보리얼리스.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추모라도 하려 하는가 싶어 텅 빈 눈으로 편지를 열었을 때,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아버지가…"
"CB 때문에, 죽은거라고…?"
아버지는 카타스트로피 대전쟁 중, CB 요원의 오발로 인해 전쟁에서 전사하셨다.
태어난 직후 부터 나의 미래는 정해져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코로나 보리얼리스에서 요원으로 일 하는 것. 나는 그 곳에서 일하기 위해 태어난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곳은 나에게 이제는 지옥 같은 곳이 되었고, 코로나 보리얼리스의 아버지가 자신들의 실수로 전사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정예요원의 아들인 나를 스카우트 하려 매일 우리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들겼다. 당신들이 무슨 자격으로, 무슨 낯짝으로 나를 찾아와 데려간다 하는건데?
그 날 처음으로, 예정되어 있던 나의 미래, 내가 태어난 이유를 거스르고 모든 연을 끊었다. 코로나 보리얼리스를 내 손으로 무너트리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내 힘을 키워 줄 곳을 찾아, 그 곳을 철저하게 짓밟아주겠다고. 당신들이 나의 아버지를 죽인 이상, 순순히 그 쪽들이 원하는대로 이루어지게 놔두지는 않을거라고.
그렇게 폐허가 되어버린 제 3세계 속에서 한 달을 숨어지냈다. 거지처럼 보여도 상관 없었다. 분명, 누군가 나를 구하러 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내 소원을 이루어줄 그 누군가가, 분명히 나를 찾아올거라고.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야지만 이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하루라도 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테니까. 없는 희망도 있는 것 처럼 생각해야 했다. 가진 것도, 아는 것도 아무것도 없었던 나에게 그 암담하던 3세계에서 한 달 이상을 버티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마냥 힘든 일이었다. 그 '누군가'를 막연히 기다리며 목숨을 부지하는 일도, 죽을만큼 힘든 일이었다.
결국 차가운 건물 안에서 쓰러졌다. 더이상은 한 발 앞으로 나아갈 힘 조차 없었기에, 차가운 바닥에 닿은 뺨은 내 몸을 모두 얼게 하는 것 같았다. 한기가 몸을 감싸고 결국은 정신까지 흐릿해졌다. 정신을 잃어가던 그 속에서 보였던 아버지의 얼굴, 나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하셨던 나의 아버지의 얼굴과. 내가 그토록 찾아헤매던 '누군가'의 얼굴.
"거기, 사람이야?"
"!"
무너진 건물 속에서 이젠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가 나를 찾아왔다.
이대로 죽는 걸까,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아버지? 손을 덜덜 떨며 정말 모든 것이 희미하게 멀어져 갔을 때,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와 내 손을 덥썩 잡아챘다. 그 때 그의 손은, 정말 차가웠어. 차가웠지만, 그 때 그가 나에게 했던 말은 얼마나 따듯했었는지. 이대로 죽는 줄만 알았던 내가 다시 한번 살 수 있는 기회를 준게 너무나도 고마워서, 아-. 나는 이제 이 사람에게 모든 것을 걸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정신 차릴 수 있어?"
"..."
"내 목소리, 들리는거 맞아?"
"…으."
"가자, 일단 가자."
최승철이라는 사람을 만나, 우리는 그렇게 코로나 보리얼리스에게 맞설 새로운 조직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코로나 아스트레일스가 정식으로 세상에 나타나고, 우리는 우리의 힘을 키워야만 했다.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과 물자, 그리고 힘. 보스는 나를 데리고 우리와 함께 할 사람들을 찾아 떠날 준비를 했다. 묵묵히 가방을 챙기고 있는 보스의 뒤에 서서 바빠보이는 그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을, 찾을거야?
"느낌이지."
"응?"
"딱 보고, 아, 넌 내가 데려가야겠다. 하면 데려오는거야."
"으에……."
그렇게 데려온 나의 친구, 그 때의 너의 머리는 변함없이 벚꽃이 흩날릴 것 같던 분홍빛이었다.
보스보다 나이가 더 많던 사람들도 있었던 그 시절, 낯가림을 이유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던 내게 막연하게 다가왔던 분홍머리의 또라이는 어느새 평생 함께 가자며, 눈빛만 봐도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다 알 수있는 사이가 되어버렸었다. 질리게도 똑똑했던 머리, 막나가는 나를 옆에서 묵묵히 잡아준 것 또한 이지훈이었다. 죽어도 같이 죽자고, 혼자 살아 돌아오면 빠른 시일 내에 죽어서 같이 저승길을 걷자고 했던 또라이. 그런 네가 무슨 이유로 나를, 그리고 조직을 버리고 떠났는지는 영원히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언제 따라올 것이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지금 떠나는 이 길을, 너와 함께 걷지 않아 오히려 다행일 뿐이다.
넌 어디선가…, 잘 살고 있는거겠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분홍머리 또라이에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절대,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걸어왔던 시간들을.
잊지는 말아달라는거다.
"내가 왜… 전쟁을 반대했었는지."
"..."
"이제 알겠지."
"..."
"당신이 이 꼴로 이 곳에 돌아오는 걸."
"..."
"한번 더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승관의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2세계의 개입, 그리고 순식간에 벌어진 참사. 승관의 시선이 베드 위에 쓰러져있는 순영의 얼굴로 향했다. 왜 그러고 있어, 그렇게 휘청거리면서 나가놓고, 왜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거냐고. 유난히 빛났다, 그의 어깨 위에 선명히 박혀있던 코로나 아스트레일스 마크가. 유난히 선명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피가.
승관이 무릎을 굽히고 쓰러졌다. 치료 조차 할 수 없었다. 호흡기를 달아줄 수도 없었다. 그는 이미 이 곳을 떠났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댔다. 적막하던 의료본부에 승관의 울음이 울려퍼졌다. 방금, 이제 방금 막 김민규를 눕히고 오는 길인데 왜 너가 이 곳에 또 와있는거냐고, 승관이 무너져가는 심장을 부여잡고 꺽꺽 울어댔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순영을 의료본부로 데려온 한솔마저 눈이 풀려있다. 모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CA의 든든한 기둥이었던 하나의 촛불이 힘없이 꺼졌다.
"편해? 이제 행복해?"
"..."
"나 여기에 혼자 남겨두고, 다 이렇게 가버리면."
"..."
"나 어떡해, 나 어떡하라고. 응?"
"..."
"죽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울음 섞인 외침이 가득 울려퍼졌다. 누구든지 승관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가슴 한켠이 저릿했을 것이다.
승자 없는 전쟁, 그 속에서 빛을 잃은 수많은 생명들. 며칠 내내 의료본부 앞을 지키고 있던 꺼져가던 불씨를 지켜보던 승관은, 붉은색을 가만히 바라보며 홀연히 사라져버린 H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마, Z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 지금 이 자리에 없는걸 다행으로 여겨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H."
"어디에 있습니까."
- 코로나 보리얼리스, 해커본부
".. 형."
"..."
"형 친구, 말이야."
"..."
"2세계 공격으로 방금, 전사한 것 같아."
말없이 장비들을 챙기던 지훈의 손이 멈추었다. 그 모습을 캐치한 석민 -그가 형을 찾고 난 이후, 다시 불리게 된 그의 본명- 이 말없이 형의 등을 감싸안았다. 연분홍빛 머리칼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가 CA를 떠나,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 순영의 근황. 그 근황의 끝은 죽음이 되었다. 지훈이 마구 울기 시작했다. 가슴 한 켠에 항상 지니고 있었던, 코로나 아스트레일스 본부 앞에서 찍었던 모두의 사진을 가슴에 파묻으며 지훈은 한참을 울었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을 눈으로 담으며, 붉게 물들은 그 눈으로 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어떻게 하게."
"2세계가 개입했어."
"..."
"이건, 2세계가 우리에게 선택권을 준거야."
"..."
"항복하거나."
"..."
"이 곳에서 모두 전멸하거나."
잠시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2세계의 개입에 누구 할 것 없이 모든 계획은 수정되고 있었다. CA와 CB의 싸움은 더이상 진행되어서는 안되었다.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린다면, 2세계는 3세계를 전멸시켜버릴 계획을 들고 이 곳에 나타났다. 지훈이 CB의 보스, 조슈아와 대화하기 위해 통신기를 들었다.
"코드네임 H, 보스 J 응답 바랍니다."
- ...
"코드네임 H, 보스 J 응답 바…"
- 의료본부입니다.
"?"
석민이 통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주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웬만하면 개입되지 않는 메딕들의 통신. 석민은 잠시 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메딕들이 전쟁 중 통신에 개입하는 것은 딱 두 경우. 하나는 치료를 목적으로 한 작전 브리핑을 위해 연결되는 통신과.
조직 내 일급요원들이 전쟁 중 사망하였을 때, 그를 알리기 위한 통신.
"코드네임 D, 통신 받았습니다."
- ...
"상황, 보고 바랍니다."
- 코드네임..
통신기 너머로 들려오는 여주의 목소리가,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심하게 요동쳤다. 덩달아 지훈 또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여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코드네임의 주인을 밝힘과 동시에, 2세계의 폭격으로 지훈과 석민이 있던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코드네임 W, 전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