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제 글들은 문득 보고싶다, 로 생각하는 장면들이 모여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번 Traveler는 조금 특이하게 소재를 얻었습니다.
제가 꾼 꿈 내용을 조금 각색한 거거든요. 원래 꿈의 내용은 여자와 남자, 그리고 둘의 아들이 등장했었습니다.
기본 틀은 비슷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을 제멋대로 바꾸어버렸습니다만,
그때 제가 눈을 뜨자마자 느꼈던 감정은 일부분이라도 작게 독자분들이 느껴주셨으면.
"왜 또 전화를 안 받아!"
현관문을 잠궜던가? 내가 신발은 제대로 신었던가?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의 존재조차 버거울만큼 신경이 곤두섰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두 다리는 이미 내 몸의 한계를 나타내고 있음에도 한없이 느리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숨이 막히는 것따위도 모르고 내달렸다. 지나치는 사람들을 모두 제치면서 민윤기의 회사 근처로 향했다. 벌써 시간이 20분 중에 10분이 흘러갔다. 11시 55분. 민윤기가 그나마 회사와 가까운 곳에서 산다는 게 지금만큼 감사한 적이 없었다.
뛰어가다가 핸드폰을 몇 번이고 눌러 민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왜 안 받아. 왜.
[여보세요?]
"가만히 있어요!"
[어?]
"회사 나오지 말라고요! 내가, 내가 갈테니까. 제발, 형. 나오지 마요."
[무슨 일인데.]
갑작스러운 내 고함에 놀란 민윤기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아, 살아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다. 살아있는 민윤기가 날 부르고 있다. 눈시울이 시큰거리는 것을 겨우 막고 무거운 다리를 끌고 더 뛰어가자 회사 앞 사거리, 인도에 서 있는 민윤기가 보였다. 살아있다, 민윤기가.
"형. 제발. 진짜... 진짜, 제, 발. 거기, 있어요. 거기. 아니."
[어. 가만히 있을테니까 진정이나 좀 해.]
신호등에 기대 서 있으니 그제서야 죽을 것 같이 올라오는 호흡이 느껴졌다. 심장과 폐가 모두 터져버릴 것 같았다. 온 몸이 절박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뱉어내면서도 시선은 끈질기게 민윤기를 바라봤다. 아직 모른다. 아직 사고시간까지 5분이 남았다. 그 전에, 민윤기를 만나 회사 안으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도로에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든지 해야한다. 우선 먼저 회사 안으로 들어가라고 해야겠다. 그래. 그래야겠다.
"형. 회사 안으로 들어가요. 다시 뒤돌아서."
[... 나중에 이유 설명해.]
멀찍이 있는, 도로 하나를 가운데에 두고 우리는 끈질기게 시선을 마주쳤다가 내 말이 끝나고 민윤기가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시선이 끊겼다. 서류 가방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에는 얇은 정장 자켓을 걸친 민윤기가 회사를 향해 걸어들어가는 뒷모습이 눈에 선연했다.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2분. 됐다. 살렸다. 이제 괜찮을거야.
"... 형! 윤기 형!"
"...?"
급커브를 돈 검은 승용차가 보였다. 고무 타이어가 아스팔트에 긁히는 괴성이 귀를 찢을 듯이 내 귀를 꿰뚫었다. 휘청이던 차가 도로를 벗어나 인도를 향해 돌진했다. 내 부름에 고개를 돌린 남자 하나가, 처연하게 흩날렸다. 그 모습이 미치도록 비현실적이라, 주위의 사람들의 경악성도, 부딪칠 때의 소름끼치는 둔탁한 소리도 모두 듣지 못했다. 신호는 바뀌지 않았다. 아, 민윤기는 신호등을 건너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신호를 기다리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차주는 나오지 않았다. 다른 행인들까지 위협하듯 거칠게 뒤로 빠져서는, 검은 아스팔트 위로 검은 자욱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 뒷모습이 꼭 저승사자 같다고 생각했다.
"윤기 형!"
사고때문에 도로와 인도가 모두 마비된 사이에 쓰러진 민윤기에게 뛰어갔다. 형편없이 널부러진 채 붉게 적셔지는 하얀 와이셔츠가 이질적이었다. 기이하게 꺾인 팔과 다리가 보였다. 멈출줄 모르는 붉은 웅덩이는 점점 퍼져나가 비릿한 향을 내뿜었다. 그 근처에 차마 가지 못하고 다리가 풀썩 꺾여 무릎을 꿇은 채 주저앉아버렸다. 왜, 왜. 어째서. 왜. 살리겠다고 왔잖아. 나는, 나는... 민윤기를, 살리려고...
"여기 119 좀 불러요!"
"어떡해. 죽은 거 아니야?"
"피 봐."
아니야. 안 죽었어. 안 죽었을거야. 그렇지, 윤기 형. 대답, 대답해봐. 어?
어떤 말도 입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시야가 다시 점멸했다. 새카맣게.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로 눈을 감았다. 결국 과거는 내가 알던 미래를 구현했다.
"형. 또 보고 있었어요?"
"아, 어. 왔어?"
민윤기는 특이한 버릇이 하나 있었다. 영화, 영상, 혹은 길거리 등등에서 울고 있는 사람을 보면 빤히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간혹 슬픈 영화를 볼 때면 남들 다 울 때도 덤덤히 있는 그는 그냥 운다는 행위를 관찰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언가 깊은 생각을 하는건지. 나는 몰랐다. 다만 그 시선의 끝이 나였다면 그걸로 족했다. 다만 그가 우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해서 부러 슬픈 영화, 책, 다큐멘터리 등등을 보여주다가 내가 울어버리는 상황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어떻게 저걸 보고 안 울 수 있어요? 안 슬퍼요?"
"네가, 진짜 슬프게 우는 사람을 못 봐서 그래."
"형은 본 적이 있어요?"
"사실 기억은 잘 안 나. 워낙에 어릴 때라. 하여튼 그 뒤로 우는 사람을 보면 그냥 보게 돼."
"특이한 버릇이네요."
민윤기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이 대화를 나눈 건 여름이었다. 막 여름이 시작 되었을 때. 그 다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더라.
"일어났어?"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러자 시야에 출근 준비를 하는 민윤기가 보였다. 아, 설마...?
"나 오늘 오전 근무가 갑자기 잡혀서 회사에 나가봐야 할 것 같아. 퇴근 할 때 연락할게."
"..."
"왜 그래. 또 악몽이야?"
"형... 오늘, 오늘 며칠이에요?"
"오늘? 왜. 갑자기. 설마 또 여행한 것 같아?"
민윤기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다가와서 땀에 흠뻑 젖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천천히 오늘 시간을 읊어주는 민윤기의 입술을 빤히 바라보다가 숨이 멈췄다. 그러다가 길게 내쉬어졌다. 아, 민윤기가 입고 있는 저 정장이 눈에 익숙했다.
"오늘 4월 30일이잖아."
능력이 나를 비웃으며 건네준 두 번째 기회였다.
"갑자기 왜 그래. 너 오늘 진짜 이상한 거 알아?"
"이상한 거 알아요. 오늘만. 오늘만 이럴테니까 제발 회사 가지 마요."
"김남준. 떼쓰지 마."
"오늘만. 형. 제발요. 제발... 나가지 마요. 하루동안 나랑 같이 있어요."
"... 나중에 이유 말할 수 있어?"
이유, 어떻게 말할까. 당신이 오늘 퇴근하는 길에 사고를 당해 죽는다고? 그래서 막고 있는 거라고? 이유를 원하는 민윤기의 물음에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감싸안고 있는 민윤기의 마른 몸만을 더 끌어안았다. 그 어깨에 얼굴을 묻고 몇 번이고 빌었다. 그냥, 가지 말아달라고. 제발 그래달라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내가 정말 안심이 되면 그때 다 털어놓겠노라고. 민윤기는 잠시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회사에 병가를 내었다. 상대가 뭐라뭐라 화를 내며 난감해하는 것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통화를 끝낸 민윤기가 이제 됐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뺑소니를 당한다면 오늘 하루 집 안에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설령 어딜 간다고 해도 같이 동행하면 되는 일이다. 죽어도 같이 죽을테니, 어떤 형태든 민윤기를 나에게 앗아가는 건 있을 수 없다, 고 생각했다.
"됐냐?"
"고마워요. 진짜, 너무 고마워요 형."
"울 것 같은 얼굴 좀 그만하고. 나 좀 놔줘. 옷 갈아입게."
놔달라는 말에 부러 더 힘을 줘 품안에 가득 민윤기를 끌어담고 그의 체취와 온기를 듬뿍 품었다. 달리느라 차올랐던 숨이, 그제야 뱉어지는 기분이었다. 민윤기는 그 뒤로 나에게 놓아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쥐고 있던 가방을 놓고 날 끌어안아줬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현관에 서서 실랑이로 버린 시간만큼이나 오랫동안 멍청히 서 있었다.
"형. 나 배고파요. 김치볶음밥 해줘요."
"너는 또 아침부터 무슨 김치볶음밥이야, 느끼하게."
"그럼 부대찌개."
"네가 할래?"
"진짜 제가 해요?"
"아니, 아, 야. 시켜먹자."
"콜. 뭐 시킬까요?"
"이 악독한 새끼..."
민윤기의 말에 입꼬리를 올려 씩 웃자 내 볼을 바로 꼬집는 민윤기의 단단한 손이 느껴졌다. 울상을 지으면서 팔을 버둥거리니 민윤기가 그제야 작게 실소를 내뱉으며 내 볼을 놓아주고 가볍게 입을 맞춰왔다. 그 입맞춤에 짧게 응한 뒤 민윤기가 떨어지자 이번에는 내가 그 뒷목을 감싸잡아 입을 맞췄다. 살짝 떨어진 입술 틈새로 두 사람의 호흡과 웃음소리가 옅게 퍼져나갔다. 이게, 내가 정착하고했던 민윤기와의 삶이었다.
"야. 우리 마트 한 번 다녀와야 될 것 같은데."
"... 내일 가면 안 돼요?"
"내일 나 종일 근무라서 갈 시간 없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리고 잊지 마라. 내일은 너도 출근이야."
"진짜 꼭 오늘?"
"당장 마실 물도 없어. 냉장고가 이렇게 비어있는데 오늘같은 날 아니면 언제 가."
"아... 그럼, 그럼 저녁에 가요. 나간 김에 저녁까지 먹고 오자."
민윤기가 내 말에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닫고는 목이 마르다며 수돗물을 켰다가, 껐다가 하면서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묵묵히 컵 하나를 가져온 뒤 냉동실에서 얼음판을 구겨 얼음 몇 개를 잔 안에 넣었다. 그리고 건넸다. 민윤기가 짧게 한숨을 쉬더니 근처 편의점이라도 가서 작은 거라도 하나 사와야 되는 거 아니냐고 했다. 난 주전자를 꺼냈다. 끓여먹자는 의미를 알았는지 어지간히 나가기 싫은거냐면서 민윤기는 수돗물을 받아 끓이기 시작했다.
애써 눈에 아른거리는, 몇 시간 전에 봤던 민윤기의 모습을 지워내었다. 민윤기는 그런 모습을 하지 않을 것이다. 차갑고 검은 아스팔트 위의 붉은 웅덩이 속에 잠겨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민윤기를 끝까지 살릴 거니까. 핸드폰 홈버튼을 꾹 눌렀다. 화면이 반짝 뜨고 상단에 시간이 큼직하게 떴다.
4월 30일. 12시 6분. 민윤기는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