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중한 의미, 기억, 추억이라고 해도 시간이라는 것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머릿속에 또렷하게 박혀 빛을 내던 기억의 단편들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고, 변질되다 끝에는 아련하다는 말로 포장이 되어 바스라진다, 고. 이게 당연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만큼 시간은 절대적이었고, 실제로 내가 봐왔던 사람들은 그랬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오로지 기억하고 있는 건 내 이름이 김남준이라는 것. 나이는 아마도 20대 초중반. 이것이 다였다. 그 외의 나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아, 굳이 하나를 추가하자면
시간, 즉 시대를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것.
언제부터, 왜, 어째서. 이런 물음은 무의미해진지 오래였다. 그저 나는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어느 시간대를 오가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났고, 많은 인연들을 쌓았다가 무너뜨리고,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래서 난 이 것이 내 운명이겠거니, 하며 긍정적으로 여행이라고 칭했다. 상당히 강제적인 여행이었지만.
여행의 주기는 제멋대로였지만 대체적으로 5년이 평균이었다. 때로는 3년 뒤, 때로는 그 다음날. 때로는 7년 뒤. 나는 어느 날 눈을 뜨면 어느 시대의 김남준이 되어있었다. 그 시대는 고대, 중세, 현대 등등 인간이 살아가는 문명의 시대 내였다. 공룡들을 만나 개죽음을 당하지 않는 것이 다행인가. 아니, 애초에, 나는 죽을 수는 있나? 그러고보니 전쟁도 몇 번이나 겪어본 주제에 명이 참 길었다.
어느 시대의 나는 희대의 천재 교수였고, 어느 시대의 나는 평범하게 알바를 하며 친구를 사귀는 젊은이었고, 어느 시대의 나는 유명한 가수였다. 그 중 언제였더라.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 교사로 매일매일 업무 스트레스에 쌓여있을 즈음. 피로에 지쳐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떠보니 내가 알던 집의 천장이 아니었다. 일어나 익숙하게 주위를 둘러보니 막 이사를 오는 중이었던지 이사직원이 날 보면서 피곤하셨냐면서 웃었다. 그냥 그렇다고 하고 일어났다.
"오늘이 며칠이죠?"
"오늘이요? 5월 29일이요."
"아. 5월 29일..."
난 방금 전까지 8월 16일에 있었는데. 옷차림, 말투, 쓰는 도구 등등. 대충 어림잡아 어느 시대이겠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고 이삿짐을 날랐다. 스마트 폰이 있는 걸 보니 21세기, 아마 2010년대 부근이겠거니 싶었다. 혹시나 싶어 내 바지 주머니를 툭툭 두드리자 역시나 스마트폰 하나가 느껴졌다. 꺼내들어 몇 번 이것저것 눌러보다가 넣었다. 전의 여행은 지금의 기준으로 따지면 아마도 50년 쯤의 과거였으니 그 시대보다 편의 시설 하나는 편하겠다, 싶었다. 딱 그 정도였다. 이런 일은 곧 내 삶의 일부분이었고, 이제와서 아쉬움을 내뱉기도, 짜증을 내기도 우스웠다. 그리고 그 날에, 이삿짐이 거의 정리가 끝날 즈음에 그를 처음 만났었다.
"새로 이사오셨나봐요."
"네. 김남준이라고 합니다. 이제 이웃사이인데 잘 부탁드려요."
덤덤히 뱉어낸 인삿말에 답하자 그는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가 이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쉽게 호의를 보이면 의심을 할 지 언정 나쁜 인상은 갖지 않는다. 밝게 탈색한 머리가 불량스러워보이지 않는 건 표정이 지나치게 단정해서일까. 첫 인상은 그냥 그랬다.
"민윤기라고 합니다."
맞다. 이름이 예쁘다는 생각도 했었다.
생각이 어린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나이를 말할 때 일부러 그의 나이를 먼저 듣고 그 나이에 조금 낮춰 말했다. 어차피 나이라는 건 나에게 무의미했으니까. 그는 첫만남에서도 형, 형하면서 살갑게 구는 나를 보고 작게 웃었었다.
서로에게 호의를 보인 또래 남자 둘이 친해지는 것은 쉬었다. 단순하고, 직설적이면서, 호의를 아끼지 않고 드러내다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는 더 빨리 마음을 열고 나에게 같이 다가와줬었다. 술을 마시고, 놀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인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긴 세월 돌아다니며 연애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였지만 그는 무언가 특별했다. 무언가, 그랬다.
"넌 가끔 뭐든지 다 안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
"그래요?"
"응. 그래서 재수없어."
"와, 상처."
입꼬리를 올려 웃으면서 내 볼을 꼬집은 그는 어린 녀석이 벌써 세상 다 산 얼굴을 하는 거 아니라며 금방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간간히 보이는 내 지식에 놀라지 않았고, 진지하게 시간의 틈을 벌려 떠다니는 여행자라고 밝혔을 때도 잠시 고민하다가 알겠다, 라는 한 마디로 내 모든 것을 받아들여주었다. 그러니까, 오랜 시간, 수많은 시대를 돌아다니며 처음 만난 내 그대로를 받아준 첫사람이었다.
진정으로 내가 목을 매달았던, 첫사랑이기도 했다.
"시간을 여행해? 그럼 떠나야 되는거야?"
"꼭 떠나야 된다는 건 없어요. 능력이 엄청 제멋대로라서. 솔직히 능력이라고 하기도 애매해요."
"뭐, 억지로 있거나 그런 건 없어? 아니면 떠나야되는 시기가 되면 몸에 징조가 온다던가?"
"그런 건 못 느껴봤는데. 대신 주기가 좀 길어요. 몇 년은 기본이니까 자꾸 나 보내려고 하지 마요. 섭하게."
"누가 보낸댔냐. 하여간에 이상한 곳에서는 또 애새끼같단말이지."
그래. 그렇게 나는 민윤기가 있는, 날 사랑하는 민윤기가 있는 시간대에 정착하기를 빌고 빌었다.
"김남준. 야, 준아."
"아..."
"또 악몽꿨어?"
"...?"
"멍청이. 눈물이나 닦고 모른 척해라."
민윤기와 사랑을 시작하고나서 한 3년 뒤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꿈의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눈물이 나왔다. 마음이 답답했고, 울컥했고, 목이 메여 제대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울음에 떨리는 숨을 뱉어내면서 눈을 뜨면 항상 걱정스러운 얼굴의 민윤기가 있었다.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항상 그랬다.
"다 괜찮아. 울지마."
기분이 나쁜 꿈은 아니었다. 나쁘기보다는 하염없이 슬프고, 슬펐다. 그런 날은 민윤기를 끌어안고 잠에 들었다. 그러면 괜찮아졌다. 도대체 무슨 꿈이었길래 그렇게 슬펐을까. 기억이 나는 것은 그저 뿌옇고 뿌연 풍경들이었다.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앞에 있었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형. 오늘 날짜가..."
악몽을 꾸기 시작하면서 또 나는 종종 시간을 여행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빈도는 낮았고 시간대도 길어봤자 몇개월, 짧게는 몇시간이었다. 크게 시대를 오가지도 않는다는 게 제일 다행이었다. 민윤기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도 익숙하다는 듯 날짜를 확인시켜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시간을 여행하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쉬면서 갑작스러운 능력의 폭주에 작게 짜증을 내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나도 속수무책이었다. 원래처럼 시대 자체를 뛰어넘는 일은 없었지만 빈도 수만 따지면 가히 폭주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나는 얼핏 그 폭주가 싫지만은 않았다. 폭주가 진행이 될수록 조금씩, 조금씩. 내 능력도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또렷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심 기뻤다. 민윤기와 같은 시간대에서, 같이 늙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겨서. 그렇다면 며칠 정도, 몇개월 정도 조금 멋대로 옮겨도 상관이 없다. 어느 시간에서 끝나도 민윤기는 내 옆에 있을테니까. 내가, 민윤기의 곁에 있을테니까. 능력이 확실하게 사라지고 나면 민윤기에게 말하고 싶었다. 내 여행은 이제 끝났다고.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말고, 우리 평생 같은 시간을 보내자고.
"형은 저 달랠 때마다 머리 쓰다듬잖아요. 평소에는 절대 안 그래주면서. 그거 달래주는 버릇같은 거예요?"
"나 어렸을 때 엄마가 내가 울면 그렇게 달래주셨거든. 안아주는 것보다는 머리 많이 쓰다듬어주셨어."
"평소에도 좀 쓰다듬어주면 안 돼요?"
투덜거리는 나를 보던 민윤기는 다가와 내게 입을 맞추었다. 넌 대신에 이거 해줄게. 그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나도 그의 허리를 감싸안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행복했다. 내가 지나왔던 그 모든 시간을 통틀어서, 가장.
[민윤기 씨 보호자분 맞으시죠? 여기 A 병원인데 민윤기 씨가 사고를 당하셔서 현재 저희 병원에...]
아까까지만해도 이제 퇴근한다며 내게 문자를 하던 사람이었다. 숨이 차오르는지도 모르고 달려간 병원에는 온 몸을 붉게 물들인 채로 눈을 감고 있던 민윤기가 날 맞이했었다. 죄송하다는 말이 들려왔다.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시간이 멈추고 그 순간 내 숨도 멈출 것 같았다. 몸은 산소가 부족하다고 급하게 들이쉬기 바빴지만 온 머리로는 오로지 민윤기를 생각했다. 민윤기의 얼굴 위로 염포가 덮어지고, 그 자리에서 나는 주저앉았다.
4월 30일. 민윤기가 죽었다.
사고가 나서 내 옆의 사람이 떠나는거야 나에게는 흔한 경험이었다. 전쟁의 시대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바로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도 수두룩하게 봤었다. 처음에는 안타까웠다. 그러다가 괜찮아졌다. 무뎌졌기 때문에 죽음이란 단어는 내게 더이상 의미가 없는 단어같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민윤기의 죽음은 절대 괜찮지 않았다.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일을 마치고, 멀리 있다는 가족들에게 연락이 간 것까지 확인한 다음 나는 집으로 돌아왔었다.
"휑하네."
휑한 집안에 들어오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대낮의 음주운전이라고 했다. 뺑소니라고 했다. CCTV가 있으니 금방 잡힐 거라고 했다.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민윤기를 죽인 사람을 잡아도 민윤기는 살아오지 않는데. 한참을 멍하니 있으면서 온갖 생각을 끌어와 안았다. 내가 감히 시간에 정착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 능력을 준 절대자가 민윤기를 앗아간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능력이 약해지는 걸 기뻐했던 건 민윤기의 옆을 오랫동안 지킬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민윤기가 없다면, 이 시대도 필요없다.
"제발. 제발. 제발 돌아가라. 제발. 과거로, 좀. 제발. 몇 개월 전이어도 좋아. 민윤기를 만나기 전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살릴 수 있게 해줘."
답답하게 막혀 숨을 뱉어내지 못하게 하는 가슴을 두드리면서 숨 대신에 절박함을 뱉어내었다. 시간을 여행하는 내 능력에게 빌었다. 제발, 민윤기가 있는 과거로 돌아가달라고. 그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막힌 숨을 토해내었다가, 눈을 감았다가, 무언가 이상한 것이 느껴져 눈을 느릿하게 떴다.
시야가 한 번 까맣게 변했다가, 환해졌다. 나는 엎드렸던 거실 한복판 그대로 있었다. 급하게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찾았다. 덜덜 떨리는 손 끝으로 핸드폰을 겨우 쥐고 손 끝이 새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줘 핸드폰을 켰다. 손이 벌벌 떨렸다. 4월 30일. 오전 11시 45분. 메세지 한 통. 부재중 전화 한 통.
[나 곧 오전 근무 끝나고 퇴근한다.]
민윤기가 사고를 당하기 20분 전, 되돌려진 시간에 나는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