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났더니...
(동공지진)
* 대형견 썰 공지 아직 안 읽으신 분들 꼭 한 번 읽어주세요.
하늘이 높아져 투명해진 푸른빛을 안고 있고, 그 아래로 겨울의 예고를 담은 바람이 활기를 띤 가을의 중반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제 제법 찬 기운을 품은 날에 따라 선풍기는 치워지고,
에어컨 리모콘이 깊은 곳에 다음 여름을 기약하면서
윤기와 남준이의 집안에도 조금 뒤늦게나마 가을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손 끝을 겨우 덮을락말락하는 긴 소매의 옷을 입은 남준이가 소파에 엎드린 채로 손가락을 까닥이며 같이 팔락거리는 소매 끝을 바라보고 있었으면.
윤기는 냉장고를 뒤적이다가 냉장실 문을 닫은 뒤에 조금 굽혔던 허리를 폈으면.
준아.
응. 주인아.
마트 가자.
윤기의 부름에 바로 고개를 올린 남준이가 윤기의 입술을 한 번, 그리고 윤기의 눈을 한 번 본 뒤에
기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으면 좋겠다.
얇은 외투를 거치고 윤기와 남준이는 걸음을 맞추어 걸어나갔으면 좋겠다.
마트까지 가는 길 위는 이제 뜨거운 아스팔트가 아니라 바스락거리는 낙엽들이 자리했으면 좋겠다.
한 걸음씩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들이 계절은 가득 껴안은 채로 남준이의 귓가를 두드렸으면.
그리고 남준이는 신이 나 조금 더 걸음을 빨리해 꾹꾹 낙엽들을 밟았으면.
저 강아지가 외출에 신이 나지 않는 날은 언제일까.
윤기 자신보다 큰 사람의 모습으로도 잔뜩 강아지같은 모습을 보이는 남준이의 행동에 윤기는 작게 웃으면서 조금씩, 걸음을 늦췄으면 좋겠다.
남준이의 신발에 낙엽 부스러기가 잔뜩 묻어있을 즈음에 남준이와 윤기가 마트에 도착했으면.
과자 봉투를 가져오다가 한 두개 터뜨려버리고,
다른 곳을 보며 걷다가 중간에 있는 세일 상품이 있는 판매대를 발로 차버리고,
시식 코너에서 마지막 남은 만두 조각을 먹으려다 떨어뜨려 울상을 짓기도 하는 시간들을 보냈으면 좋겠다.
마트에 겨우 나와서는 오늘은 마트를 다 안 둘러보냐며 아쉬워하는 남준이와
그 옆에서 조용히 한숨을 삼키는 윤기의 손에 종이 봉투 하나씩 들려있었으면.
저녁시간을 조금 지난터라 길거리에는
데이트 하러 나온 연인들,
밥을 먹고 나와 간식거리를 든 채 수다를 떨며 걸어가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
바쁘게 어디론가 걸어가는 사람들로 꽉 들어찼으면.
그리고 좁은 틈으로 지나가느라 윤기가 앞에,
그 뒤를 바짝 남준이가 따라갔으면 좋겠다.
한참 잘 걷던 윤기가 가게 간판의 빛이 햇빛을 대신해 거리를 채울 즈음에 뚝, 멈췄으면.
윤기의 등에 살짝 부딪친 남준이가 급하게 손을 올려 윤기의 양쪽 팔뚝을 잡고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으면.
기대와 달리, 마주치지 않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윤기의 시선을 따라 옆에 있는 악세사리 가게를 바라봤으면 좋겠다.
살 거 있어?
얼마 전에 망가졌으니까.
윤기가 다가가 여러 모양의 도수 없는 렌즈가 있는 안경들 중에 하나를 들어올렸으면 좋겠다.
며칠 전에 자신이 밟아 부러뜨렸던 안경테가 생각나 남준이가 멋쩍게 웃으며 윤기의 옆에 섰으면 좋겠다.
얇은 테의 둥근 안경.
두껍고 각진 네모난 안경.
특이한 색의 안경 등등.
윤기는 비슷한 뿔테 안경 쪽을 살피는 동안 남준이는 이런 모양의 안경도 있나, 싶어 이것저것 둘러봤으면 좋겠다.
얼굴 가득, 호기심을 보인 채 두리번 거리는 남준이를 윤기는 슬쩍 보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으면.
이미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놨으면서 가만히 서서 안경을 같이 더 둘러봤으면 좋겠다.
준아.
응?
이거.
그러다 윤기가 남준이에게 한 안경을 건넸으면.
도수는 없지만 여러 사람의 손을 탄 건지 뿌연 시야에 남준이가 작게 인상을 찡그리다가 안경을 금방 썼다가 벗었으면.
별로야?
아니, 안경을 꼈더니 세상이 너무 뿌옇게 보여서.
그건 닦으면 되니까. 뭣하면 렌즈 빼버리고.
그렇게 시간이 지날 수록 남준이는 가만히 윤기가 건네는 안경을 써보고,
윤기는 처음에는 어울리는 안경을 찾아보려고 했다가, 나중에는 흔치 않게 인상을 찡그리는 남준이의 표정을 눈에 담아내었으면 좋겠다.
중간중간 파티용품같은 특이한 안경을 찾아낸 남준이가 그걸 쓴 채로 대뜸 나타날 때는
윤기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리기도 했으면 좋겠다.
결국 딱 두 개의 안경이 계산이 되어 다른 봉투에 포장되었으면.
그제서야 남준이와 윤기의 조금 더 길어졌던 쇼핑이 끝났으면 좋겠다.
바깥 내음을 잔뜩 묻힌 채로 집 안에 들어온 남준이와 윤기가 먼저 한 일은 사온 물품을 정리하는 것이었으면.
서늘한 집안은 보일러까지는 틀지 않아도 될 때라 그저 외투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바로 차곡차곡 사온 물품을 정리했으면.
따듯한 물에 씻고 나와서 발그레한 볼의 남준이가 나른함에 소파에 누워있는 사이,
뒤늦게 윤기가 씻고 나와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로 유일하게 포장을 풀지 않았던 것을 풀어내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샀던 안경과, 남준이에게 가장 잘 어울렸던 안경을 꺼내어
혹시 몰라 안경알을 한 번 더 닦아내었으면.
그리고 자신의 안경을 써본 뒤에 마저 남준이의 안경에 택을 떼어내고는
준아.
라는 말과 함께 남준이에게 다가갔으면.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베고 누워있던 남준이가 그대로 고개만 뒤로 젖혀 거꾸로 된 세상을 바라봤으면 좋겠다.
윤기가 다가와 허리를 숙이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가오는 윤기를 따라 다시 고개를 움직였으면.
윤기 너는 그대로 남준이의 배 옆에, 소파 빈공간에 앉아 닦았던 안경을 들어 남준이에게 씌워졌으면 좋겠다.
안경 잘 어울리네.
주인도 안경 잘 어울려.
안경을 쓴 남준이가 씩 웃고 있으면, 윤기 너는 손을 뻗어 이제 눈을 겨우 찌를 것 같은 앞머리를 쓸어올려줬으면 좋겠다.
반듯한 이마,
코 끝에 걸쳐진 안경,
곧게 뻗은 콧대,
씩 올라가 있는 입꼬리와 그 끝에 자리한 귀여운 보조개.
남준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윤기가 자신의 뒷목을 감싸는 손길에 손을 움직여 남준이의 가슴팍을 짚었으면.
그러다가 흘러내려온 앞머리들을 또 한 번 정리해 올려주고는 드러난 이마에 입을 맞추었으면 좋겠다.
잘생겼어.
그 말은 아마도 속으로 삼킨 채로.
이마에 닿은 간지러운 감촉에 남준이가 키득이며 웃었으면 좋겠다.
뒷목을 감쌌던 손으로 짧게 윤기의 하얀 목덜미를 주무른 뒤에
양 볼을 감싸고 살짝 상체를 들어 입을 맞췄으면 좋겠다.
살짝 고개를 돌리는 사이에
달그락, 안경끼리 부딪친 채 엇갈리면
윤기와 남준이가 동시에 입술을 떼어내고 작게 웃어버렸으면 좋겠다.
깜박했네.
키스할 때는,
안경을 벗어야 하는데.
먼저 말한 윤기가 남준이의 안경을 벗기면, 똑같이 남준이도 윤기의 안경을 벗기고 난 뒤에
다시 입을 맞춰왔으면 좋겠다.
마주잡을 듯이 겹쳐진 남준이와 윤기 손 끝에 안경다리끼리 얽힌 두 안경이 겨우 매달려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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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자랑 |
예쁜 글씨와 귀여운 그림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하트. |
[암호닉 신청 받고 있습니다.] |
- 신청 기간이 끝난 후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