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F(x) - You Are My Destiny
찬열아 사랑해, 정말로. 늘 내게 빛이 되어줘서 고마워.
※ 꼭 BGM과 함께 감수성이 예민한 깊은 밤 혹은 새벽녘에 읽어주세요.
BGM의 가사를 다시 되뇌이며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열세 번째 이야기. 너 하나만 있으면
☆★☆★☆★
사랑해.
수 없이 되뇌었던 기억 속의 낱말을 하나씩 지워가며.
찬열아. 넌 어디에 있니.
-
대체 무슨 정신으로 집에 돌아온 걸까.
집에 돌아오자마자 문득 핸드폰이 없는 걸 깨달았다.
찬열이가 갖고 있을텐데. 내게 돌려줄까?
착잡했다. 어떠한 생각도 더는 들지 않았다.
속이 꽉 막혀서 숨을 쉬는 것조차 내 맘대로 되어 주지를 않았다.
차라리 이런 날 잠이라도 왔으면 좋을텐데, 잠도 멀리 달아나 나는 진한 보랏빛의 하늘을 보며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사랑, 이라는 단어는 듣기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사랑이란 것도 그저 하나의 감정일 뿐인데, 사람들은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하는 것을 꺼리고 그에 환상을 갖는 이를 '과대망상병자'라 칭한다.
사랑이란 게 꼭 그렇게 무거운 감정은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추억이라 생각하는 첫사랑의 기억도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니까.
너무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 엄마 방에 몰래 들어가 꺼내온 엄마의 핸드폰으로 사랑에 관한 가사를 모두 찾아 보았다.
그리고 그 가사에 모두 공감을 표할 때 쯤, 나는 정말 내가 '사랑'을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진지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내게 사랑이란 것은 너무 큰 주제 같았는데. 어쩌면 내게 소리없이 다가와 콕콕 나를 찌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찬열이는 나를 정말 좋아하지 않는 것일까.
찬열이는 정말 그 전학온 아이를 좋아하는 걸까?
그럼 나를 한 순간도 좋아해 본 적이 없는 걸까?
나 혼자 찬열이를 좋아했던 것일까.
울적함의 늪 속에 점점 깊게 빠져들어갔다.
괜히 침대 헤드에 기대 창문 너머 보이는 달을 보았다.
이럴 때,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
어김없이 아침은 시작되고 자연스럽게 등교를 했다.
학교에 도착하자 내 책상 위 한가운데에 단정히 놓인 핸드폰이 보였다.
나는 잠시 울컥하는 감정을 심호흡하며 꾹 누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평소에는 짧은 머리임에도 책상에 머리 끝이 닿는 게 싫어 꼭 머리를 묶었는데, 오늘따라 주위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학년에서 제일 잘생긴 박찬열, 예쁜 것도 돈이 많은 것도 공부를 잘 하는 것도 아닌 오징어.
둘은 아슬아슬하게 권태기를 달리고 있고, 박찬열이 다른 여자 애를 좋아한다는 걸 어제 직접 들어버린 오징어.
사람들이 날 불쌍하게 보는 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아예 내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에 대한 눈을 감아버렸다.
진리와 수정이가 벌써부터 떠도는 소문을 들은 것인지, 내게 조심히 다가와 물었다.
"오징어.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무엇이라 대답을 해야 할 지 몰라 그저 앞에 앉은 걱정스러운 표정의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래. 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단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감사한 것이다.
나는 어떤 감정을 드러내야 할 지 몰라 그냥 웃어버렸다.
그 때 갑자기 옆에서 쾅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아 씨발. 조용히 안 해?"
평생 들어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찬열이의 화난 모습.
나는 멍하니 찬열이를 올려다봤다.
찬열이는 책상을 박차고 일어난 채로 주위를 훑다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내 시선에서 멈췄다.
나는 공허한 눈동자로 찬열이를 올려다보았고, 찬열이는 내 시선을 피했다.
-
점심을 거르겠다고 하고 걱정하는 진리와 수정이를 급식실로 보냈다.
텅 빈 교실에 남아 책상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정리했다.
노트를 펼쳐 보아도 찬열이와 필담을 나눈 것들이 가득 적혀 있었고,
교과서를 펼쳐 보아도 찬열이가 수놓은 체리 그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찬열이의 교과서에는 내가 그려놓은 꿀벌과 꿀단지 그림이 가득하겠지.
이 모든 추억이 다 휴지조각만도 못한 쓰레기로 치부되고 있다는 게 좀 슬펐다.
"오징어."
내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낮은 목소리에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그러다 보니 앞문, 그러니까 나와는 꽤 떨어진 곳에 삐딱하게 기대서 날 쳐다보고 있는 찬열이가 보였다.
"왜?"
"잠깐 얘기 좀 해."
"뭐."
"어제는 있잖아, 내가…"
"응."
"…그러니까."
쉽사리 말을 못 꺼내는 모습이 답답해서 끌어안고 있던 책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찬열이의 앞으로 걸어갔다.
"나 하나만 물어도 돼?"
"뭔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제, 내가 들은 소리 말이야."
"……."
"내가 잘못 들은 게 맞지? 무슨 오해가 있는 게 맞지?"
"…징어야."
"…아니야?"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부정을 해 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내 당장의 심정이었다.
아니리라 믿었는데, 이렇게 네가 부인을 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시는 울지 않을 것이라 수 차례 다짐했음에도 너무 아픈 현실이었다.
"왜 아니라고 말을 못 해? 내가 들은 게 정말이야?"
"그게 아니고."
"내 눈 좀 봐 봐. 왜 내 눈을 못 봐."
울먹이며 팔을 뻗어 찬열이의 턱을 내게로 향하게 돌렸지만, 찬열이는 내 눈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세 번째로 외면받은 나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내가 찬열이에게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더라도 상관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미 찬열이의 태도로 받은 상처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는 너무나 힘들 것 같았으므로.
"고마워 찬열아."
그 말을 남기고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밖에.
-
아무 말도 없이 학교를 빠져 나왔다.
애초에 핸드폰은 꺼져 있었고, 갈 곳도 정해져 있었다.
나는 찬열이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를 쓰며 천천히 길가를 걸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낡고 지저분한 한 놀이터에 들어섰다.
이 놀이터는 막 재개발이 결정된 낡은 아파트 단지 사이에 놓인 놀이터였다.
오빠와 나와의 아지트.
엄마와 아빠가 싸우면, 나는 늘 눈물을 펑펑 터뜨렸다.
그럼 오빠는 나를 꼭 끌어안고 내 등을 토닥이며 이렇게 말했었지.
「괜찮아, 징어야. 다 괜찮아.」
그러니까, 우리 엄마와 아빠는 실패한 재혼 부부였고, 결국 몇 년 전 또다시 이혼을 하셨다.
엄마는 누군가의 아내라는 족쇄 아래에 버티는 것을 힘겨워했고, 아빠는 상당히 가부장적인 성격이었다.
결국 아빠의 아들인 오빠, 백현과 엄마의 딸인 나는 어릴 적부터 상처를 많이 겪으며 둘이 가장 가깝게 엮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더이상은 부모님의 결혼 실패에 대한 기억이 내게 상처로 남아있지 않았으나,
오빠는 여전히 내게 치유가 되어주는 존재였다.
나는 어릴 적 늘 오빠랑 둘이 파고들어갔던 오색 미끄럼틀 속에 들어가 앉았다.
하늘이 가려지고, 대신 노란색 빨간색 플라스틱들이 내 시야를 가로막았다.
때론 이러한 답답함도 좋은 것 같았다.
내가 이 안에서 울고 있단 걸 아무도 알 수 없으니까.
한참을 울다가, 지쳐서 자다가, 멍하니 노란 플라스틱의 입자를 살피다가.
그러다가 문득 핸드폰을 켜 보니 열두 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옛날엔 무서우면 찬열이한테 전화하면 되었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할 수 없단 것이 좀 슬펐다.
그런 생각을 잠시 하고 있을 무렵,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어 오빠."
- 어디야, 너.
"아… 나. 놀이터."
- …어디 안 좋은 일 있었어?
내가 놀이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상태를 유추해낸 오빠가 이 곳에 오겠다며 꼼짝말고 기다리란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오빠는 많이 바쁠텐데. 엄마가 전화했나.
오빠는 정말 금방 달려왔다.
덜 지워진 화장과 무대 의상으로 거친 호흡을 뱉으며 내 앞에 간신히 선 오빠는, 천천히 내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오징어. 얼마나 울었어?"
"모르겠어."
"왜 울고 그래. 오빠한테 전화하라니까."
"오빠는 바쁘잖아."
"바쁜 오빠가 너 찾으러 이리저리 뛰어다닌 건 괜찮구?"
"…미안해."
오빠는 날 그네에 앉히고 천천히 날 밀어주었다.
내가 울음을 멈추고 나면 오빠는 늘 내게 그네를 태워줬었다.
새삼 잊고 있던 옛날 기억이 떠올라 나는 괜히 교복을 입은 다리를 쭉 뻗었다가, 교차했다가, 풀었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응."
"남자친구랑 싸운 거야?"
"음… 그러니까."
나는 상황 정리를 위해 잠시 말을 골랐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가 뱉은 말은 이랬다.
"내가 너무 미안해서."
"왜?"
"내가 너무 매력이 없었나봐. 그 애한테 어울리지 않게."
"……."
"그러니까, 걔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있을 때 나의 처절한 처지를 털어놓는다는 건 내 감정을 더 자극하는 길인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울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숨을 못 쉬어서 한참을 기침만 뱉고 온 얼굴이 찌푸려져 눈물 콧물로 젖었다.
오빠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날 끌어안아서 내 턱을 어깨에 받쳤다.
"괜찮아, 징어야. 다 괜찮아."
고맙고, 미안하고, 너무 좋은데 미웠다.
모든 게, 사람들이, 네가, 그리고 박찬열이.
-
몇 달이 지났고, 나는 찬열이의 빈자리 대신 EXO로 가득 채우게 되었다.
아이들은 비웃었지만,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이미 찬열이와 나는 공공연하게 헤어진 사이가 되었고, 시험기간이었기 때문에 딱히 부딪힐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정말 이렇게 평화로울 줄만 알았단 것이었다.
찬열이가 좋아한다고 이미 소문이 나 있던 그 전학생이 갑자기 내 책상 위에 모든 짐들을 올려 놓으며 사근사근하게 말을 걸었다.
"오징어. 내가 여기 앉아도 될까? 찬열이 옆에 앉고 싶어서."
나는 자존심도 상했고, 내가 비켜줄 이유가 하나도 없단 생각에 반박을 하려 입을 뗐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을 해 보면, 찬열이는 이 아이를 좋아하고, 나보다 이 아이와 앉는 것을 좋아할 테니까.
내가 비켜주는 게 맞는 걸까?
나는 입을 다시 다물고 별 것이 들어있지도 않은 책상 속을 깨끗이 비웠다.
가방을 메고 책상 안에 있던 모든 파일들을 품에 안아서 일어났다.
수정이가 화를 내며 그 여자아이에게 달려들 듯한 행동을 취했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수정이를 앉히고 맨 구석의 자리로 스스로 향했다.
끝 없는 상처와 아픔의 물레방아 속에서 끝 없이 희생당하는 내가 미우면서도 불쌍했다.
나는 책상 속에 몇 없는 파일들을 넣고, 책상 위로 엎어졌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
"니가 왜 여기 앉아 있어? 오징어는?"
"징어 너랑 깨졌잖아. 붙어있으면 어색할까봐,"
"니가 뭔 상관이야? 오징어 어딨냐니까?"
큰 소리가 들려서 잠에서 문득 깼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는 곳을 슬쩍 쳐다보자, 그 곳엔 찬열이가 전학생에게 불 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니가 오징어한테 비키라고 했냐? 나한테 들러붙으려고?"
"박찬열. 그런 게 아니라,"
"닥쳐. 존나 꼴도 보기 싫어, 미친년아."
찬열이는 여자아이에게 욕을 하며 정말 전에 봤던 것의 수십 배로 화를 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필 오랜만에 제대로 보는 게 또 화내는 얼굴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그 쪽을 보고 있는데, 찬열이가 화에 못 이겨 앞머리를 투박한 손으로 쓸어넘기다 문득 나를 발견했다.
찬열이는 바로 내게 큰 보폭으로 걸어와 나를 거세게 일으켜 질질 끌고 뒷문을 쾅 열어 교실 밖으로 나갔다.
찬열이는 나를 옥상 앞 인적 드문 계단까지 끌고 와서야 날 놓았다.
그 충격에 바닥에 쓰러져버리는 바람에, 압정이 내 손바닥에 꽂혀 피가 콸콸 쏟아졌지만, 찬열이도 나도 그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징어. 넌 걔가 그런다고 다 받아줘? 어?"
"……."
"너도 나도 서로한테 헤어지자고 한 적 없잖아. 그런데 왜 너는 꼭 헤어진 사람처럼 구는데?"
"……."
"그래. 나 너 좋아해. 너 여덟 살 때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고, 미국 가서도 계속 너 좋아했고, 중학생 때도 너 좋아했고, 지금도 너 좋아해."
"……."
"그런데 왜 넌… 너는 나 안 좋아해? 나 혼자 너 좋아했던 거야?"
"……."
"나는 니가 우는 걸 볼 때마다 어떻게 해야 될 지도 모르겠고, 니가 화를 낼 때에도 널 어떻게 가라앉혀야 될 지 몰라서 혼자 쩔쩔매는데. 넌 아니야?"
"……."
"왜, 너 혼자 모든 걸 판단해. 정수정한테 다 들었어. 넌 내가 밉지도 않아? 내가 그렇게 힘들게 했는데도 어떻게 네 생각은 하지도 않아?"
찬열이는 다다다 말을 쏟아내다가, 결국 감정이 복받친듯 살짝 눈이 촉촉해졌다.
난 그 때까지도 멍하니 찬열이를 올려다보며 아직도 마르지 않은 눈물 줄기를 또 그려내고 있었다.
"오징어. 제발 나 좀…"
"……."
"좋아해줘. 제발."
처량히 뱉어진 그 갈라진 목소리와 함께 찬열이는 계단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나는 잠시 그 말을 곱씹어보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서 찬열이의 아랫 계단에 앉은 뒤 찬열이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잠겨버린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내가 널 왜 안 좋아해."
"……."
"이런 말, 진짜 오글거려서 싫어하는데 박찬열. 잘 들어. 오징어 인생에서 처음 해 보는 말이야."
"……."
"…사랑해. 찬열아. 많이."
모든 게 멈춘 것 같았다.
찬열이의 눈물이 내 교복 블라우스 위에 톡 떨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찬열이가 고개를 숙여 내 볼에 입술을 갖다댔다.
사랑이란 건, 생각보다 무거운 감정이 아니란 것.
그 감정을 피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도 하나의 열쇠가 되어줄 수도 있다는 걸.
꼭, 찬열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사랑해.
☆★☆★☆★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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